타키투스

타키투스

다른 표기 언어 Tacitus 동의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Publius Cornelius Tacitus
요약 테이블
출생 56경
사망 120경
국적 로마

요약 주요 저서로 게르만족에 관한 〈게르마니아〉, 69~96년의 로마제국을 서술한 〈역사〉, 14~68년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가 있다. 타키투스가 쓴 책의 원문은 수없이 필사되었고, 근대 학자들은 로마제국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그의 글을 연구했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문체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타키투스의 혈통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타키투스는 행정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으로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에는 작문 연습을 비롯한 일반적인 문학 교육이 포함되었다. 77년에 타키투스는 로마 콘술이자 훗날 브리튼 섬 총독이 된 아그리콜라의 딸과 결혼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호민관, 재무관, 법무관을 거쳐 군단을 지휘하는 속주의 고위직을 4년 동안 맡았으며, 97년에 콘술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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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 생애와 활동
  3. 초기 문학작품
  4. 평가
  5. 역사와 연대기
타키투스(Tacitus)
타키투스(Tacitus)

개요

저서로는 게르만족에 관한 〈게르마니아 Germania〉, 69~96년의 로마 제국을 서술한 〈역사 Historiae〉, 14~68년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 Annals〉가 있다.

초기 생애와 활동

타키투스는 이탈리아 북부(갈리아키살피나) 또는 갈리아 남부(갈리아나르보넨시스:지금의 프랑스 남동부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코르넬리우스는 로마 귀족 가문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로마 귀족의 후예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속주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총독의 이름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교육받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타키투스는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에는 작문 연습을 비롯한 일반적인 문학 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훈련은 행정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이었다. 타키투스는 일류 웅변가인 마르쿠스 아페르와 율리우스 세쿤두스 밑에서 변호사 수업을 받았다. 그후 그는 '비르긴티비라테'(하급 행정관으로 임명된 20명 가운데 하나)와 군사 호민관(군단 참모)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77년에 타키투스는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딸과 결혼했다.

아그리콜라는 77년(또는 78년)에 로마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훗날 브리튼 섬 총독으로 명성을 높였다. 타키투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는데, 장인인 아그리콜라의 정치적 연줄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단계를 거쳐 81년경에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고, 88년에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예언서인 〈시빌레의 책 Sibylline Books〉을 보관하고 외래 종파의 예배 의식을 감독하는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군단을 지휘하는 속주의 고위직을 4년 동안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귀족을 억압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년을 직접 목격했다. 93년에 아그리콜라가 죽었지만, 이때쯤에는 타키투스도 독립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네르바 황제시대인 97년에 그는 콘술이 되었고, 네로가 죽은 뒤 68~69년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유명한 군인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의 장례식에서 추도연설을 했다.

이런 명예는 그가 웅변가로서 얻은 명성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도덕적 권위와 공적인 지위도 반영했다.

초기 문학작품

98년에 타키투스는 2권의 작품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 De vita Julii Agricolae〉와 〈게르마니아〉라고도 부르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환경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을 썼는데, 둘 다 그의 개인적 관심을 반영했다.

〈아그리콜라〉는 장인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저술한 책으로, 브리튼 총독 시절(78~84)과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말년을 특히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아그리콜라를 찬양하는 한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편견없는 정치적 판단을 보여준다. 〈게르마니아〉는 라인 강 연안의 로마 국경 지방을 서술한 책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원시적 악덕만이 아니라 소박한 미덕도 당시 로마 도덕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던 사실과 대비해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 부족이 힘을 합하면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의 글은 지리학의 범위를 넘어서 정치적 민족지학으로 발전했다. 이 저서는 게르만족의 상황에 대한 행정관의 평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게르만족에 대한 역사적 입문서 구실을 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여전히 법정 변호사로 일했지만 당시 웅변은 정치적 기백을 많이 잃어버렸고 웅변가들의 솜씨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웅변의 이러한 쇠퇴는 그가 쓴 〈웅변에 관한 대화 Dialogus de oratoribus〉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신의 젊은시절을 언급하면서, 스승인 아페르와 세쿤두스를 소개하고 있다. 〈웅변에 관한 대화〉는 8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 문체가 더 키케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서의 문체는 형식과 주제에서 나온 결과일 뿐, 문체의 발달과정에서 초기 단계에 씌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주제를 가지고 추측하면 타키투스가 이 저서를 쓴 연대는 98~102년이 분명하다. 타키투스는 웅변을 문학생활의 한 방법으로서 시와 비교하고, 공공생활에서 웅변이 차츰 쇠퇴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로마 공화국은 진정한 웅변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로마 제국은 웅변술에 대한 창조적 자극을 제한했다. 이 저서는 그가 웅변에서 역사로 관심을 돌린 시기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반영하고 있다.

평가

타키투스의 저서는 로마 제국 초기의 역사를 요약할 때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료도 아니고 그의 정치적 태도가 지배계급의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은 4세기에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그의 책의 뒷부분을 연장 서술할 때까지 읽혔고 그가 쓴 원문은 수없이 필사되었다. 근대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타키투스의 글을 연구하고 있다. 문학적인 면에서 타키투스의 글은 문체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와 연대기

〈역사〉는 69년 1월 1일 갈바 황제 집권 당시(69. 1. 1)부터 96년 도미티아누스의 죽음까지를 다루었다(역사편찬). 이 저서는 12~14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역사〉와 〈연대기〉는 오늘날에는 둘 다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통틀어 30권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음). 소(小)플리니우스의 언급으로 미루어보면 105년까지는 몇 권이 이미 완성되었고, 107년쯤에는 집필이 상당한 진척을 보였으며, 109년에는 집필이 끝난 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69~70년을 다룬 제1~4권과 제5권의 일부뿐이다. 이 부분은 갈바와 피소가 오토에 의해 몰락한 사건(제1권),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누린 지위 및 오토가 자살하여 비텔리우스에게 길을 열어준 사건(제2권), 비텔리우스가 베스파시아누스를 편든 도나우 군단에 패배한 사건(제3권), 베스파시아누스의 집권(제4, 5권)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이지만, 그 원문을 보면 로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플라비우스 왕조시대를 훌륭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타키투스가 직접 목격한 서부 속주의 상황과 도미티아누스 시대 말기의 로마 상황을 다룬 부분은 더욱 뛰어나다. 웅장한 서론 부분을 포함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서술은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이처럼 힘찬 글은 산문적인 어조와 색채에도 불구하고 69년 내전 때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잇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하는데 가장 적절하다.

이것은 타키투스의 역사 기술의 첫단계에 불과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로 접근함에 따라, 그는 속주와 국경 문제를 제외하고는 일관성이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로마의 정책에 직면했다. 이것은 좀더 날카로운 분석을 요구했으며, 그는 대개 격렬한 반감과 분노 및 신랄한 풍자로 로마의 정책을 분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말년에 보인 폭정은 귀족정치의 전통을 짓밟았다. 타키투스가 도미티아누스의 평판을 마지막으로 어떻게 자세히 다루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 황제를 묘사한 부분은 아마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하면서 연습한 것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타키투스가 책을 쓴 연대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네르바 황제시대에 명성을 얻었고, 자유주의 정책의 효과를 누렸다. 동시에 그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가 제위를 계승했을 때 일어난 제국정책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후 112~113년 속주 총독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되어 행정관 경력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는 개인적 경력을 쌓는 동안 권력의 속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특히 왕조 정치의 결과에 정통했다. 왕조 정치는 베스파시아누스부터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그러했듯이 통치자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통치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노예 상태로 떨어뜨리며, 이는 오직 네로의 통치 말기처럼 로마 내부나 국경 수비대의 반란으로써만 상황이 바뀔 수 있었다.

타키투스의 역사관을 암시하는 요소와 더불어 그의 개인적 경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을 분석해보면, 그의 생애에서 지적인 전환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전환기를 거친 뒤, 그는 로마 제국의 본질을 좀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그리콜라〉에서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시대를 끝내면 새로운 정권에 대해 계속 기술하겠다고 가볍게 약속했지만, 이제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뒤로 되돌아갔다.

그는 더 이상 현재를 기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정책을 강화했을 때부터 시작된 과거의 정치적 부담을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중요한 사건들을 문학적으로 세밀하게 서술하는 전통적 연감 형식을 채택한 〈연대기〉는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부터 68년에 네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시대를 다루었다.

이 저서는 18권이나 16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타키투스가 이 책들을 6권씩, 즉 티베리우스에 관한 제1~6권(이것은 다시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를 다룬 제1~3권, 세야누스와 티베리우스를 다룬 제4~6권으로 세분됨)과 칼리굴라(가이우스) 및 클라우디우스를 다룬 제7~12권으로 분류했다는 증거가 있다.

타키투스는 제국의 초기시대로 되돌아갈 때, 이 분야에서 반드시 선배들의 자리를 빼앗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배들의 주제를 이용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선배들의 체계적인 기록을 존중한 것 같다. 그의 주된 목적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비판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황제의 통치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했고, 이렇게 강해진 중앙의 통제력은 68~69년의 쿠데타 이후에 세워진 플라비우스 왕조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연대기〉는 그가 〈역사〉에서 이미 묘사한 제국의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서, 로마의 정치적 자유가 쇠퇴한 원인을 이야기체로 서술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제국의 첫 1세기를 하나의 단위로 보았다. 예를 들어 그는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의 개인 행동을 비교했는데, 이것은 그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왕조 권력이 낳은 비슷한 상황이 둘 모두를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의 책에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이 냉정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근대 세계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제국의 창시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적어도 그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를 공화국을 지배한 마지막 장군으로 생각했다.

〈연대기〉를 쓰기 시작할 때, 타키투스는 참신하고 유능한 사람이 지배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로마 정부에 주기적으로 강력한 권력자가 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귀족주의적 태도였지만, 통치능력과는 관계없이 왕조의 관습에 따라 개인이 권력을 계속 누리는 것은 로마의 전통을 파괴하고 공공도덕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장군으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전제 왕조가 존속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티베리우스의 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