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리비우스

다른 표기 언어 Titus Livius
요약 테이블
출생 BC 64/59, 이탈리아 파타비움
사망 AD 17, 파타비움
국적 로마

요약 저서 <로마사>가 당대에 이미 고전이 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 서술의 방식과 원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사〉 집필은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다. 그는 <로마사> 전체를 5권 단위로 집필해 출간할 계획으로 작업을 시작했고, 각 권의 길이는 고대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분량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자료가 생각보다 복잡해짐에 따라 균형잡힌 양식을 포기했으며, 모두 142권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11~20권, 46~142권은 전해지지 않고, 제46권 이하의 책들은 모두 요약집으로만 전해진다. 대표적인 요약집으로는 그 일부만 남아 있는 2종류가 있다. 하나는 3세기 때 쓰인 이집트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37~40권과 48~55권의 줄거리가 실려 있으며, 다른 하나는 <요약서>라고 알려진, 4세기에 나온 전체 내용의 요약집이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활동
  3. 로마사
  4. 역사학 접근방식
디도 리비우스(Titus Livius)
디도 리비우스(Titus Livius)

개요

그의 〈로마사 Ab Urbe Condjta Libri〉는 당대에 이미 고전이 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 서술의 방식과 원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생애와 활동

리비우스의 생애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생지인 파타비움은 부유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엄격한 도시로 유명했고, BC 40년대의 내란 때 큰 어려움을 겪은 곳이었다. 리비우스는 당시 교양있는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에서 공부를 하려 했으나, BC 44년 카이사르가 죽은 뒤 내란이 일어나 로마가 어지러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의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으면서도 번역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른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오랫동안 살지 않았고, 그리스어 실력 또한 당대인들이 구사하던 평균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탓으로 추측된다.

그가 받은 교육은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기초를 두었으며,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철학적인 대화집을 몇 편 쓰기도 했다. 초기 활동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의 가족은 파타비움에서는 유력한 가문이었던 것 같지만, 원로원 의원의 지위까지는 오르지 못했으며 리비우스 자신도 정치가나 변론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즉위)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제국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 온 뒤에야 리비우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로마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로마사〉에 나타나는 증거로 미루어볼 때, 그는 BC 29년 또는 그 직전에 로마사 저술을 구상했으며,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얻기 위해 그 전에 이미 로마로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로 리비우스와 거의 똑같은 범위의 역사를 다루려 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BC 30년에 로마에 정착한 사실은 이때부터 로마에 평온한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낸 것이 틀림없으며, 정착 초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관심을 끌었고, AD 8년경에는 어린 클라우디우스(뒤에 황제가 됨)의 문필교육을 맡아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그러나 예술 후원자인 마이케나스 같은 사람들과 시인인 호라티우스·베르길리우스·오비디우스 등 로마의 문필가들과는 결코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았다. 리비우스의 이름이 이들과 관련해 언급된 적은 없으며, 공식적인 후원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을 만큼 개인적으로 충분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에 대한 드문 일화 가운데 하나를 보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를 가리켜 '폼페이 사람'이라 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솔직하면서도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그의 필생의 작업은 〈로마사〉 집필이었다.

로마사

리비우스는 〈로마사〉 전체를 5권 단위로 집필해 출간하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역사학). 각 권의 길이는 고대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분량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자료가 생각보다 복잡해짐에 따라 그는 균형잡힌 양식을 포기했다. 모두 142권인 〈로마사〉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그러나 11~20권, 46~142권은 현재 전해지지 않음). 즉, ① 1~5권:로마 시의 설립에서 갈리아인의 로마 약탈까지(BC 386), ② 6~10권:삼니움 전쟁, ③ 11~15권:이탈리아 반도 정복, ④ 16~20권:제1차 포에니(카르타고) 전쟁, ⑤ 21~30권:제2차 포에니 전쟁(BC 201)까지, ⑥ 31~45권: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와의 전쟁 종결(BC 167)까지, ⑦ 46~70권:동맹시(同盟市) 전쟁(BC 91)까지, ⑧ 71~80권:내란과 마리우스의 죽음(BC 86), ⑨ 81~90권:내란과 술라의 죽음(BC 78), ⑩ 91~103권:폼페이우스의 개선(BC 62)까지, ⑪ 104~108권:공화국 말기, ⑫ 109~116권:내란과 카이사르 암살(BC 44), ⑬ 117~133권:카이사르 죽음부터 악티움 해전까지, ⑭ 134~142권:BC 29~9년의 사건 등이다.

문법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부분과 제120권에 짤막하게 나온 키케로의 죽음 부분을 제외한 제46권 이하의 나머지 책들은 모두 요약집으로만 전해진다.

〈로마사〉의 전체 분량을 펴내는 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AD 1세기부터 계속해서 요약집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요약집으로는 그 일부만 남아 있는 2종류가 있다. 하나는 3세기 때 쓰인 이집트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37~40권과 48~55권의 줄거리가 실려 있으며, 다른 하나는 〈요약서 Periochae〉라고 알려진, 4세기에 나온 전체 내용의 요약집이다.

〈요약서〉에 실려 있는 기록을 보면, 제121권은(그 이하의 다른 책들도 포함한 듯함) AD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 뒤 출간됐다고 적혀 있다. 즉 악티움 해전에서 BC 9년까지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20권들은 원래의 계획에 추가로 덧붙인 것이었으며,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만한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생전에는 출판되기가 어려웠음을 암시하고 있다.

리비우스가 정한 원래의 작업 목표는 정말 놀라운 것으로, 그는 1년에 평균 3권의 책을 쓰기로 계획했다.

이 작업의 방대함을 나타내 주는 2가지 이야기가 있다. 정치가인 소(小)플리니우스는 자신의 글에서 말하기를, "리비우스는 이 작업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으나, 포기하기에는 자신이 이미 너무 깊이 이 일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한다. 그는 또한 카디스의 한 시민이 이 위대한 역사가를 보겠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로마까지 왔던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역사학 접근방식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 쓴다는 계획은 그렇게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 최초의 역사가인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 이래로 200여 년 간 로마에서는 역사 연구와 역사책 저술이 성행했다. 역사서 저술에는 고대 연구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목적이라는 2가지 중요한 동기가 있었다. 특히 BC 100년 이후부터 사람들은 고대의 의식이나 가문의 족보, 종교적인 관습과 같은 것들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학술서도 많이 나왔다. 키케로의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연대기와 트로이 왕가의 역사에 대한 책을 썼다.

다른 작가들은 에트루리아의 종교에 대해 상당히 긴 분량의 책들을 편찬했으며, 당시 로마 최고의 학자였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일종의 백과사전인 〈신과 인간의 시대 Divine and Human Antiquities〉를 썼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학문적 수준이 높지 않았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뿌리가 전설적인 아이네아스와 트로이 왕가에서 비롯됐다는 식으로 카이사르의 출신 가문을 미화하려는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인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로마인들은 지나간 역사를 크게 의식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골동품에 대한 관심도 컸다.

리비우스 이전의 역사가들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서 관직을 가졌다. 파비우스 픽토르는 프라이토르(법무관)였으며, 대(大)카토는 콘술(집정관)이자 켄소르(감찰관)였고, 살루스티우스도 프라이토르를 지냈다. 술라나 카이사르 같은 여러 유명한 정치가들도 거의 모든 여가 시간을 역사서를 쓰는 데 보냈다.

이들의 역사 저술이 정치적인 변명을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의 경우), 한편으로는 교양있는 여가 활용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란 정치 연구로서 이것을 통해 현재를 설명·해명할 수 있다는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로마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원로원이나 행정기구에서 한 번도 관리로 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로마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개인적으로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뜻했고, 이것은 그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무지는 이따금 그의 책에 드러나 있다. 또한 그는 관공서에서 보관하고 있는 원로원 회의 의사록이나 조약 문서, 법조문들 같은 수많은 자료들을 직접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또한 그가 만약 사제나 아우구르[卜占官]였다면 역사적 가치가 큰 내부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사제 교육기관에 있는 다량의 문서와 기록들을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로 인한 가장 중요한 결과는 리비우스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의 역사책이 가진 참신함과 충격은 그가 역사를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이 같은 의도를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살루스티우스와 초기의 역사가들도 로마인들의 도덕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름으로 살기 때문에 역시 나름대로 행동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당파적인 정치보다는 인간 개개인과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의 차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파타비움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겪어온 경험을 통해 그는 당시의 도덕적인 폐해를 특별히 강하게 느낀 듯하다.

당시 의식있는 로마인들도 도덕적 관점에서 역사를 본 리비우스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입법과 선전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이상을 심어주려 했다.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도 자신들의 시를 통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고, 계속 그 위대함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은 도덕적 자질임을 주장했다.

개인이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려고 갈망했던 탓에 리비우스는 학문적인 정확성을 기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와 그 이전 세대의 로마인들이 고대 유물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참고한 다른 역사책들을 진지하게 비교하거나 모순점들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그는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을 규명해 줄 도덕적 일화들을 짜맞추기 위해, 폴리비오스와 같은 역사가들이 저술한 초창기의 역사서를 참고하곤 했다. BC 4세기에 베이(Veii)를 점령하고 로마에서 갈리아인들을 몰아낸 마리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대한 묘사는, 카밀루스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장면 묘사는 임기응변에 뛰어난 한니발의 대담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다만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복잡했던 당대의 역사를 리비우스가 어떻게 기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키케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현재 전해지는 책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개인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서술 기법의 약점과 경솔함, 또는 고대 유물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한 평가이다. 그는 당대인들을 위해 역사를 재구성했고 그렇게 해서 그의 책은 의미 있는 책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리비우스의 연설회에 참석한 청중들이 그의 고상한 성품과 열변에 감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열변은 그의 비범함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요소이다.

키케로·타키투스와 함께 리비우스는 새로운 문체를 확립했다.

초창기 로마의 역사가들은 교양어인 그리스어로 작품을 썼으나, 그 후계자들은 로마의 역사는 라틴어로 써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라틴어에는 역사 서술에 걸맞는 문체가 그때까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비롯한 여러 장르에 적합한 문체를 개발해야 했다. 살루스티우스는 구문을 곡해해서 사용하거나 일부 고어 또는 독특한 단어들로 된 어휘를 써서 투키디데스의 그리스어 문체를 라틴어로 그대로 옮기려고 했다.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기는 했으나, 그결과 작품의 양에 상관없이 글쓰기가 너무 힘들고 부적절했다.

리비우스는 다양하고 유연한 문체를 썼으므로 고대의 비평가 퀸틸리아누스는 그의 글을 가리켜 "부드럽고 풍부한 문체"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는 대단히 길고, 끝부분을 화려하게 꾸미는 문장으로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긴박한 상황을 나타내야 할 때는 간단명료하고 비약적인 문장을 사용했다.

다른 기록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반면에 전투를 묘사할 때는 시적이고 극적인 어휘를 동원하곤 했다. 연설은 과거의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키케로와 같은 당대 웅변가의 감정적 분위기나 극적이고 사실적인 어조를 이용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쓸 때는 내 마음도 같이 과거로 돌아간다"고 그는 썼다.

리비우스의 역사책은 솔직한 성격을 가진 개인주의적 사상가의 작품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부흥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것이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는 작품에 스며 있는 도덕적인 진실성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의 진로를 이해하려 한 사심없는 시도(타키투스에서 클래런던 경에 이르는 후대의 역사가에게 영향을 주었음)야말로 리비우스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