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다른 표기 언어 Claudius 동의어 로마 제국 제4대 황제
요약 테이블
출생 BC 10. 8. 1, 갈리아 루그두눔(리옹)
사망 AD 54. 10. 13
국적 로마

요약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통치권을 북아프리카까지 확대하고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만들었다.
황실에서 방치된 상태로 역사와 저술에 몰두해있었으나, 41년 가이우스가 살해당한 뒤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랐다. 내정 면에서는 사법제도를 세부적으로 개선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확대했다. 종교정책에서는 전통을 존중하고 옛 종교의식을 부활시켰다. 행정정책으로는 황제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자신이 임명한 원로원 관할 속주의 총독들에게 재정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주었다. 43년 브리튼을 침공해 카물로두눔 점령을 지휘했으며, 그곳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속국들을 만들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를 합병하고 2개의 속주로 재편했고, 소아시아의 리키아와 트라키아도 점령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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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황제 즉위와 식민지 정복
  4. 행정의 쇄신
클라우디우스(Claud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개요

로마 통치를 북아프리카로 확대하고 브리타니아(브리튼)를 속주로 만들었다(로마사).

초기생애

인기 있고 성공을 거둔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안토니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였다.

건강이 나쁘고 외모가 매력적이지 못한데다 행동이 투박하고 취미가 조잡해 공직 생활에 걸맞지 않아 황실에서는 그를 골칫거리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오랫동안 혼자 공부하고 혼자 놀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를 인정해주고 역사 연구에 대한 취미를 일깨워주었다.

삼두정을 편 콘술(집정관)들에게 처형당한 공화주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인 키케로를 옹호하는 소책자를 썼으나, 로마 공화정 말기에 벌어진 내전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치를 출발점으로 해 로마사를 썼다. 에트루리아의 역사에 관한 20권의 책과 카르타고의 역사에 관한 8권의 책을 모두 그리스어로 집필했으며 자서전과 철자법 개혁안을 담은 로마어 알파벳의 역사에 관한 연구논문도 썼다. 후에 황제가 되어 그 개혁안을 실행하려고 했으나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즐기던 주사위 놀이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저작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의의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트루리아 역사에 관한 저술은 독창적인 자료를 담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첫번째 부인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가 에트루리아 혈통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문을 통해 클라우디우스는 에트루리아 전통의 진수를 접했을 수도 있다. 우르굴라닐라와 이혼한 뒤에 아일리아 파이티나, 발레리아 메살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小)아그리피나 등과 결혼했다. 그가 황제에 즉위할 때는 발레리아 메살리나가 부인이었다.

앞의 3명의 부인에게서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드루수스와 클라우디아는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다. 청년시절에 클라우디우스는 다양한 종교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나 콘술이 된 것은 겨우 37년에 형의 아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고 난 이후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거의 애정이 없었다.

황제 즉위와 식민지 정복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가 살해된 뒤 권력이 뜻밖에 클라우디우스에게 굴러들어왔다.

가이우스 살해 당시 그가 궁궐 안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것을 한 병사가 발견했다. 황실의 친위부대인 근위대는 1월 25일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가문의 전통과 복고적 성향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의 귀족계급에게 동조했으나 병사들과 궁정의 관리들이 그의 실질적인 지지세력이었으며 노예 출신 자유민들과 외국인들은 그가 무시당하던 시절에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처음에 원로원의 태도는 좋게 말해서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42년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달마치야 총독의 반란을 지지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로도 클라우디우스의 목숨을 노린 암살 기도에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이 가담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의 권위에 경의를 표하고(그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속주들을 원로원의 관할로 되돌려주었음) 기사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는 했지만, 두 계급의 개별 성원들을 다루는 데는 무자비했고 때로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처음부터 그는 군대와 자신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자신을 황제로 선포해준 대가로 현금을 지불했다.

43년 브리튼을 침공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원정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 템스 강 도강작전과 카물로두눔(콜체스터) 점령을 지휘한 것은 인기와 영예를 얻기 위한 그의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그가 진압하려고 한 드루이드교 사제단이 반(反)로마적 영향을 미치는 데 대한 우려와 전반적으로 변경을 확대하고 싶은 욕심도 작용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물로두눔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그 속주의 변경을 보호하기 위해 속국들을 만들었다. 이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어 47년 이케니의 속왕인 프라수타구스가 일으킨 반란이라든지 나중에 그의 부인 부디카(보아티케)가 일으킨 전면적인 반란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또한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를 합병하고(41~42) 2개의 속주(동부의 카이사리엔시스와 서부의 팅기타나)로 재편했다. 또 소아시아의 리키아(43)와 트라키아(46)도 합병했다. 그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왕국을 넓혀주었다가 44년 아그리파가 죽자 유대를 속주로 만들었다.

49년에는 이투레아(동북부 팔레스티나)를 시리아 속주에 합병했다. 그는 게르만족이나 파르티아족과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는 것을 지지했으나, 52년 파르티아족과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그곳의 친(親)로마 정부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두는 입장을 취해 어려운 상황을 후임자에게 떠넘겼다.

내정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시행한 많은 조치는 개명한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법제도를 세부적으로 개선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확대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중부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일부를 포괄하는 도나우 강 남부의 노리쿰 지방에서 5개 부락이 로마 자치시가 되었다. 또한 그는 카물로두눔 외에도 51년에 게르마니아의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지금의 쾰른) 같은 식민지를 여러 군데 세우고 도시화 정책을 장려했다.

종교정책에서 클라우디우스는 전통을 존중하고 옛 종교의식을 부활시켰으며 47년에 백년제(로마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는 3일 낮 3일 밤의 운동경기와 희생제)를 열었다(로마 종교). 또 47년에는 스스로 켄소르(감찰관)가 되었으며, 49년에 로마의 포메리움(즉 로마 신들만을 섬기고, 행정관들이 군사력이 아니라 민간정부의 권한으로 통치하는 지역의 경계)을 확장했다. 그는 점술가들을 보호하고 프리지아의 신 아티스의 숭배의식을 로마식으로 바꾸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클라우디우스 Claudius〉(25)에 따르면 한동안 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교도들을 포함해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일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유대인들의 기득권을 인정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집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일 없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남아 있는 알렉산드리아 시에 보낸 한 서한(41)에서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파멸적이고 고집스러운 상호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신적인 영예를 누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추세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카물로두눔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도록 했다. 그가 벌인 공공사업으로는 로마의 곡물공급 체계를 재편한 것과 오스티아에 새 항구를 건설한 것 등이 있다.

오스티아의 항구는 나중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시 고쳐 지었다.

행정의 쇄신

클라우디우스의 전반적인 정책은 제국 재정과 속주 행정에 대한 황제의 통제력을 높이고 자신이 임명한 원로원 관할 속주의 총독들에게 재정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종의 자유민 내각을 만들어 다양한 행정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일부 훼손된 루그두눔 명문(銘文)에 기록되어 있는 갈리아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내용의 연설,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한 알프스 지방의 아나우니족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주는 내용의 칙령,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알렉산드리아 시에 보내는 서한과 같은 일련의 인상적인 문헌들이 클라우디우스의 개인적인 통치방식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남아 있다.

즉 그의 통치방식은 현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인자하다가도 진노에 차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는 전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루그두눔 명문은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 Annals〉에서 똑같은 연설에 대해 해설한 것과 흥미 있는 대비를 이룬다. 명문에 기록된 연설은 부적절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주제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타키투스의 책에는 그런 내용들의 많은 부분이 빠져 있음) 클라우디우스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를 알고 있고 로마 전통의 잠재력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메살리나와의 결혼생활은 48년 그녀가 그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녀의 애인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개 결혼식을 함으로써 파국을 맞이했다. 메살리나와 실리우스는 살해당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조카딸인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이 행위는 로마 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그는 법을 개정했다. 아그리피나의 권력욕을 채워주기 위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아들 브리탄니쿠스에게 손해가 가는 것을 무릅쓰고 그녀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뒤의 네로 황제)를 양자로 맞아들여야 했다. 그뿐 아니라 새로 임명한 근위대장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도 아그리피나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었다.

로마의 전설은 하나같이 클라우디우스가 54년 10월 13일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독버섯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때 추방당했다가 나중에 아그리피나의 권유로 다시 불려와 네로의 교육을 맡았던 정치가이며 풍자문학가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신성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 Apocolocyntosis divi Claudii〉(이 제목과 그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음)라는 풍자문에서 죽은 황제와 그를 신격화(원료원이 정식 선포함)하는 것에 대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클라우디우스의 모습은 후기 로마 사가들이 클라우디우스의 정치에서 인기 없는 측면을 상세히 부각시켜 설명한 것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신성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는 그의 신체적 특징과 말솜씨를 풍자하고 재판관으로서의 자질을 비방하면서 그가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멋대로 법적 판결을 내리는가 하면 친척들, 원로원 의원들, 기사들에 대해 즉석에서 처형 명령을 내리는 독단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그리고 후대의 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잘못을 그의 유약한 성품과 부인들 및 해방노예들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은 말과 달리 상류계급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했던 황제에 대해 상류계급이 품은 적개심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의 평가가 일면적이라는 것은 클라우디우스가 얼마나 권위 있게 정력적으로 수행했는가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문헌들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