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세네카

다른 표기 언어 Lucius Annaeus Seneca
요약 테이블
출생 BC 4경, 스페인 코르도바
사망 AD 65, 로마
국적 로마

요약 세네카는 1세기 중엽 로마의 지도적 지성인이었고,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로마에서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와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를 혼합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조카딸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그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그 곳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부루스 등 강력한 친구 집단을 만들었고 훗날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되자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그는 은퇴를 허락받고 남은 해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65년에 적들로부터 고발당하여 자살을 명령받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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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가족
  3. 철학 저작과 비극
  4. 인물과 영향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개요

1세기 중엽 로마의 지도적 지성인이었고,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초기생애와 가족

세네카는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Seneca the Elder)는 로마에서 수사학교사로 유명했다. 어머니 헬비아는 훌륭한 성격과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형 갈리오는 52년 아카이아에서 성 바울로와 만난 적이 있었다. 남동생은 시인 루칸의 아버지였다. 세네카는 어릴 때 큰어머니를 따라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와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를 혼합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세네카는 병에 걸렸으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그곳에 있는 그의 큰어머니는 사령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다.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황제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변론 때문에 그만두었다.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부적합한 환경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 Consolationes〉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의 영향력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돈많은 여자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신임 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 강력한 친구 집단을 만들었고 훗날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되자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친구들은 게르만과 파르티아 국경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권을 장악했다.

네로는 세네카가 초안을 쓴 첫 대중연설에서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자유민과 여성의 영향력을 끝장내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그밖에도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네카와 부루스는 비록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 출신이었지만 로마 세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한 좀더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했다. 그들이 임명한 코르불로가 파르티아군을 이겼다.

영국에서는 부디카의 반란이 진압되자 좀더 계몽된 통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역사가 타키투스(56경~117)가 말했듯이, "인간사에서 뒷받침할 자기 힘이 없는 권력보다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은 없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폭군이 총애한 인물들이었다. 59년에 그들은 아그리피나의 살해를 묵과하거나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은퇴를 허락받고 남은 해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65년에 세네카의 적들은 그가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자살을 명령받고 꿋꿋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철학 저작과 비극

〈신성한 클라우디우스의 바보만들기 Apocolocyntosis divi Claudii〉는 세네카의 남아 있는 다른 저작들과 매우 다르다.

빈정거리고 무엄한 정치적 풍자인 이 글의 주제는 클라우디우스를 신으로 만드는 것 또는 바보만들기이다. 그밖의 저작은 철학책과 비극으로 나누어진다. 철학 책들은 '중기' 스토아 철학의 절충적 견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견해는 로도스의 파나이티우스(BC 2세기)가 로마 시장을 겨냥하여 채택했고 그와 같은 나라의 포세이도니오스가 BC 1세기에 발달시켰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세네카가 자연과학에 관해 쓴 〈자연의 의문들 Naturales quaestiones〉에서 소개하는 인물이다. 이 책에서 자연 연구에 관한 매우 고귀한 일반적 주장들은 사실에 관한 빈약한 설명 때문에 빛을 잃고 있다. 위로문 가운데 〈마르키아에게 보낸 위로문 Ad Marciam de consolatione〉에서는 아들을 잃은 부인을 위로하고, 〈헬비아에게 보낸 위로문 Ad Helviam matrem de consolatione〉에서는 그가 추방당했을 때 어머니를 위로하고, 〈폴리비우스에게 보낸 위로문 Ad Polybium de consolatione〉에서는 아들을 잃었으나 코르시카에서 로마로 돌아오려고 아첨하며 애걸하는 강력한 자유민 폴리비우스를 위로한다.

〈분노에 관하여 De ira〉는 분노의 정념, 그 결과, 조절 등을 길게 다룬다. 〈관용에 관하여 De clementia〉는 네로에게 충고하는 편지이며 자비를 로마 황제의 군주 자질로 권유한다. 〈영혼의 평정에 관하여 De tranquillitate animi〉·〈지혜의 불변성에 관하여 De constantia sapientis〉·〈행복한 삶에 관하여 De vita beata〉·〈여가에 관하여 De otio〉 등은 스토아주의적 현인의 삶과 자질의 여러 측면을 살핀다.

〈자선에 관하여 De beneficiis〉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눈으로 본 자선을 산만하게 다룬다. 〈삶의 짧음에 관하여 De brevitate vitae〉는 드문 일이지만 사람의 일생은 시간을 적절히 쓰기만 하면 충분히 길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장 잘 썼고 설득력 있는 글은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에 관한 서한 Epistulae morales〉이다. 이 책에 실린 124편의 빛나는 논문은 하나의 정식으로 줄이기 힘든 폭넓은 도덕문제를 다룬다. 10편의 '세네카' 비극 가운데 〈옥타비아 Octavia〉는 분명히 가짜이고 〈용맹한 헤라클레스 Hercules Oetaeus〉도 아마 가짜일 것이다. 나머지는 세부적인 면에서 독창성도 조금 있지만 그리스 비극의 유명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 작품들을 스토아주의 '교훈극'이라는 도식적 취급방식에 따라 정리하려는 노력은 이해하기 어렵다. 공개상연보다 연극독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음조는 매우 단조로우며, 무시무시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강조한다. 일련의 인상적인 연설과 성가곡이 있지만 배우들은 정지상태로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이 연극들은 르네상스 세계에 알려진 고전 비극 중 대표적인 것들이며 특히 영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셰익스피어의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존 웹스터의 〈The Duchess of Malfi〉, 키릴 투어너의 〈Revengers Tragaedie〉는 유령, 마녀, 잔인한 폭군, 복수라는 주제 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세네카 비극의 자손이다(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인물과 영향

세네카에 대해서는 악의 있는 선전이 뒤따라다녔다.

1세기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세네카의 교육적인 영향을 비판했다. 타키투스는 세네카의 역사적 지위에 관해 이중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군주정과 그 임무에 관한 세네카의 견해는 안토니네스 시대(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 138~192)의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동안 스토아주의가 널리 퍼지는 바람에 그의 철학은 계속 살아 있었다. 그의 철학이 그리스도교와 유사성이 있다고 밝혀지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그가 성 바울로를 알고 있었다는 믿음과 이 믿음을 실증하기 위한 가짜 편지 모음도 있었다. 아우구스틴과 제롬의 연구에 따르면 세네카의 저작은 감옥에 있는 보에티우스를 위로했다. 세네카의 사상은 흔히 선집으로 걸러지지만 중세 라틴 문화의 한 구성요소였다. 단테·초서·페트라르크에게 알려진 그의 도덕 작품들은 에라스무스가 편집했다. 영어 완역본은 1614년에 나왔다. 16~18세기에 세네카의 산문은 내용과 문체 면에서 모국어 문학이 발달하는 데 수필·설교·교화의 모범으로 이바지했다. 칼뱅·몽테뉴·루소 등이 그 예이다.

최초의 '스페인' 사상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에서는 항상 강했다. 19세기에 전문화의 바람이 불자 세네카는 철학자·과학자·영사가·문학도 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65년에 그의 죽음 2,000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학문적 연구와 관심은 세네카 부활이 진행중임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