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티아

오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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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지금의 오스티아안티카. 고대 로마의 도시.

고대의 오스티아는 티베르 강 하구에 있었으나 지금의 오스티아안티카는 상류쪽으로 약 6㎞ 지점에 있다. 오늘날 해변휴양지는 고대의 도시 자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5㎞ 거리에 있다. 로마 공화정시대에는 항구였고 제정시대에는(BC 27~) 상업 중심지였다.

로마인들은 오스티아를 최초의 식민지로 간주했으며 제4대 왕인 앙쿠스 마르키우스(BC 7세기)가 소금생산을 위해 이 도시를 만들었다고 여겼다. 고고학자들이 그 부지에서 BC 4세기 중엽의 요새를 발견했는데, 그 이후 더 오래된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요새는 해안선 방어가 목적이었으며 일련의 길게 뻗은 로마의 해안식민지들 중 최초의 것이었다. 로마 해군이 창설되면서 오스티아는 해군기지가 되었고 포에니 전쟁(BC 264~201)중에는 이탈리아 서해안의 가장 큰 함대기지 역할을 했다. 로마 공화정 때는 특히 곡물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큰 항구였다가 모래톱 때문에 일부가 훼손되면서 대형 선박이 들어오기에는 부적합한 곳이 되었다. 제정시대에는 로마에 곡식을 공급하는 통상기지 및 저장소였으며 또한 포르투스로 가는 선박의 수리소이기도 했다.

목욕탕·신전·창고 등이 새로 건설되어 도시의 번영을 뒷받침해주었다. 번영의 절정에 달했던 2세기초 오스티아의 인구는 5만 명가량이었다.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사람들은 벽돌로 지은 3~5층짜리 아파트식 건물에서 살았다.

이 건물의 마루는 모자이크식으로 깔았고 벽은 정교한 회화로 장식했으며 가장 넓은 층에는 방이 12개까지 있었다. 도시의 부가 성장하자 지도적인 시민들이 부담하는 공공비용의 수준도 올라갔다. 공공기금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사람들은 행정관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영예에 대해 실제적인 방식으로 감사표시를 할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행정관들은 공공건물과 공공장소를 장식한 조각상을 기증하고 대부분의 신전을 건립했다. 오스티아는 또한 황제의 관심을 살만큼 로마의 입장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이곳에 있던 가장 큰 공중목욕탕 3곳은 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2세기말 이후에는 새로 지은 건물이 거의 없었다. 오스티아는 3세기에 시작된 로마 경제의 쇠퇴와 5세기부터 계속된 이민족의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827~844 재위)가 지금의 오스티아안티카 자리에 그레고리오폴리스를 건립한 이후 이곳은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로마 시대 유적들은 중세의 건축자재와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들의 대리석 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파내어졌다. 그후 19세기에 교황의 권한으로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되어 로마 시대 도시의 2/3가량이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