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루스티우스

살루스티우스

다른 표기 언어 Sallustius
요약 테이블
출생 BC 86경, 삼니움 아미테르눔
사망 35/34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역사가, 뛰어난 라틴어 문장가.
(영). Sallust. 정식 이름은 Gaius Sallustius Crispus.

당대의 정치가·부정부패·당파싸움 등을 다룬 이야기체 저술로 유명하다.

살루스티우스의 가문은 지방 귀족계급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의 가문 중에 로마 원로원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그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인물'(novus homo)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었으며 이 점은 그가 역사적 판단을 내릴 때 그 내용과 논조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초기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으나 아마도 BC 70~60년 동방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것 같다. BC 52년에 최초로 정치적 직책인 호민관직을 맡았다.

살루스티우스가 BC 55년경에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BC 53년에는 선거에서 혼란사태가 벌어져 로마 내에서 정식 관직으로는 호민관 이외에 다른 직책이 없었으며 다음해에는 초반부터 폭력사태가 벌어져 악명 높은 선동가이며 프라이토르(법무관) 후보였던 클로디우스가 콘술(집정관) 후보였던 밀로 일파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재판에서 키케로는 밀로를 변호했으며 살루스티우스와 동료 호민관들은 키케로를 공격하는 열변을 토했다. 이 사건의 정치적 분쟁은 그의 저술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BC 50년에 살루스티우스는 부도덕하다는 혐의를 받고 원로원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카이사르에게 피신했으며 그해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카이사르 휘하의 지휘관이 되었다. 기록에 나와 있는 그의 유일한 전투는 패배로 끝났다.

2년 후에는 프라이토르로 임명되어 카이사르 부대 내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BC 46년에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출정에 참가해 약소한 전과를 올렸으며 누미디아 영토(지금의 알제리)에 속주 아프리카노바가 창설되었을 때 초대 총독을 맡아 BC 45년(또는 44년초)까지 재임했다.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살루스티우스는 속주에서의 강탈·착취 혐의로 고발당했으나 카이사르의 중재 덕택에 재판을 받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살루스티우스의 행동과 그의 비판적인 저서 사이의 상반된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며 호화스러운 살루스티우스 동산(Horti Sallustiani)이 부정한 재산으로 만들어졌음을 시사해준다.

그의 도덕성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당시에 떠돌던 상스러운 험담과 더불어 역사가인 그를, 그의 양자로서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장관을 지낸 엄청난 부자이며 호사가였던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와 혼동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살루스티우스의 정치활동은 로마 귀환 직후에 끝났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듯 자발적으로 은퇴했을 수도 있고, 카이사르의 총애를 잃거나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 압력을 받아 은퇴를 강요당했을 수도 있다.

살루스티우스는 BC 43년말 삼두정(三頭政)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글을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내란 시대에 태어났으며 대외 전쟁과 정치 분쟁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따라서 그의 글이 폭력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틸리나의 전쟁 Bellum Catilinae〉(BC 43~42)은 카틸리나의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로마 정치의 부패상을 다루고 있다. 귀족인 카틸리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로서, 동료 귀족들의 의심과 대중들의 불신 때문에 합법적인 권력장악이 어렵게 되자 BC 63년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살루스티우스가 보기에 카틸리나의 범죄행위와 그로 인해 초래된 위기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살루스티우스는 음모의 진행과정과 함께 원로원과 당시 콘술이었던 키케로가 취한 조치를 서술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BC 63년 12월 5일 원로원에서 음모가들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토론을 다루는 데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살루스티우스는 카이사르와 카토를 시민의 도덕을 대변하는 사람이며 당시의 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연설가들로 보았다.

그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을 공화정 역사에서 한 시기를 마감하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보았다. 이 저작의 여담에는 당파싸움을 공화정 붕괴의 첫째 요인으로 보는 그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

〈유구르타 전쟁 Bellum Jugurthinum〉(BC 41~40)에서 그는 로마에서 일어난 당파싸움의 기원을 BC 2세기말에 로마에 반기를 든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로 잡고 여기에 대해 상세하게 파고들었다.

이 전쟁은 살루스티우스나 키케로처럼 새로운 인물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콘술직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마리우스의 권력장악은 전통적으로 배타적인 경향을 띠었던 로마의 정치 엘리트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으나, 한편으로는 살루스티우스가 보기에 전쟁과 폐허만 가져올 뿐인 정치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살루스티우스의 의견으로는 로마가 초기에 전쟁을 그르친 것은 자신들의 탐욕과 배타적 특권을 위해 공동 이익을 희생시킨 소수 권력층의 잘못이며 전체적으로는 귀족계급(원로원)과 민중(평민계급)의 충돌 때문이었다.

〈유구르타 전쟁〉과 아울러 〈역사 Histories〉에서도 삼두정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역사〉는 BC 78~67년의 로마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다.

〈카이사르에게 보내는 편지〉 2통과 〈키케로에 대한 비난〉이라는 글은 살루스티우스의 문체로 씌어 있어 종종 그의 글로 여겨졌으나 이는 부정확한 추측인 것 같다. 후대의 로마 역사가들은 리비우스(BC 59~AD 17)처럼 그를 반박한 인물이든, 아니면 타키투스(56경~120경)처럼 그의 필법과 견해를 발전시키고 다듬은 인물이든 간에 모두 그의 영향을 폭넓게 받았다.

그의 역사 서술은 연설과 인물묘사, 여담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생생한 활력이 넘치며 옛것과 새것을 능숙하게 결합해 고전의 경지에 달한 문체를 창출해냈다. 그는 또한 로마의 정치가 공식 기록에 묘사된 그대로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살루스티우스는 역사가로서 완벽하게 찬양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많은 시대착오와 부정확성,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유구르타 전쟁〉에 서술된 지리적 사실들은 그가 북아프리카의 지리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BC 146년 카르타고의 파멸을 로마 위기의 출발점으로 다루고 있지만 위기의 징후는 실상 그 이전부터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심오한 사상가도 아니었으며 진부한 철학적 문구를 나열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로마의 국가구조를 공격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도덕적·정치적 가치는 전통에 머물렀다. 말하자면 현재를 혹평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정치체험은 분석과 문체에 활력과 열정을 불어넣어주어 독자들의 관심을 강하게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