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다른 표기 언어 月印千江之曲

요약 원래 상·중·하 3권이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이 전한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으로 오래된 작품이며, 종교성과 문학성이 조화를 이룬 장편 불교서사시이다.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가보〉를 기초로 〈석보상절〉을 한글로 편찬하게 했다. 다음 해 7월 〈석보상절〉이 완성되자 세종은 이에 부합하여 석가모니 일대기를 시의 형식으로 읊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말은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책은 불교문학이 국문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보물 제398호로 지정된 상권은 현재 대한교과서(주)에서 소장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보물 제398호. 활자본. 원래 상·중·하 3권이었으나 지금은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이 전한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으로서는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다음으로 오래된 작품이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시킨 장편 불교서사시이다.

1446년(세종 28) 3월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 〈석가보 釋迦譜〉를 기초로 〈석보상절 釋譜詳節〉을 국문으로 마련하게 했다.

다음해 7월 산문으로 된 〈석보상절〉이 완성되자 세종은 이에 부합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시의 형식으로 읊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한다. 지은이가 세종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석보상절〉의 편찬을 도운 김수온(金守溫) 등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며, 간행시기는 1447년 또는 1450년경으로 추정된다. 상권에 실린 노래만 해도 194곡인 것으로 보아 원래 상·중·하 3권에는 582곡 안팎의 노래가 실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질은 전하지 않으나 〈월인석보 月印釋譜〉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약 440곡이 남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말은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는 수많은 불교 경전에서 거듭 다루어졌고 노래로 지어 부르는 전통도 거듭 시도되었으나, 이 책에서는 한시가 아닌 우리말로 창작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이 나게 개작되었고, 불교문학이 국문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거의 같은 시기에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창작된 문학작품으로 노래의 형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월인천강지곡〉에는 한시가 부기되어 있지 않고 국문을 큰 활자로 먼저 적고 한자는 작게 달았으며, 해설에 해당하는 〈석보상절〉도 국문으로 적었다. 국문문학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영웅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일상성을 배제하려 했으나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영웅의 세계를 능가하는 상상을 일상생활의 모습과 함께 나타냈다.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의 특징으로서 음가 없는 종성에 '이미지'이 사용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음가 없는 종성에 '이미지'이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중성의 자형에 있어서도 '이미지', '이미지'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상권은 진기홍이 소장하고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1961년 통문관에서 영인·간행했으며, 〈국어학 國語學〉 1호(1962) 등에도 영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