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널드

아널드

다른 표기 언어 Matthew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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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2. 12. 24, 잉글랜드 미들섹스 래일엄
사망 1888. 4. 15, 리버풀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아널드는 평론집 <교양과 무질서>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독선과 속물근성, 금전숭배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길 잃은 난봉꾼 외>(1849) 등의 초기 시집은 ‘A’라는 이름 첫 자만 밝힌 채 출판되었다. 1853년 본명으로 출판한 시집에는 왜 〈엠페도클레스〉를 제외시켰는가를 설명하는 유명한 서문이 실려 있어 판을 거듭해 출판되었다. 그의 시는 내밀하고 개인적이며 감상적 비관주의 등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 저작인 <교양과 무질서>에서 기계문명의 번영과 물질문명을 추구하는 영국 사회를 공격했다. 영국사회가 귀족은 야만인, 중산계급은 속물, 하층계급은 민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산계급에게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말년에는 그의 평생의 지속적인 관심거리였던 종교 문제를 다루는 <성 바울로와 신교>(1870) 등을 써서 성공회적인 '근대주의'의 기반을 세웠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생애
  3. 문학 업적
  4. 비평가로서의 아널드
  5. 종교적 저술

개요

당시의 '야만인'(Barbarians:귀족), '속물'(Philistines:상업적인 중산계층), '민중'(Populace)의 취향과 예법에 대한 고전적인 공격으로 유명하다.

〈교양과 무질서 Culture and Anarchy〉(1869)와 같은 작품을 통해 '교양'의 옹호자가 되었다(문학비평).

생애

1828년 럭비 학교 교장으로 임명된 저명한 교육자인 토머스 아널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럭비 학교에 입학하고(1837)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재학중 〈크롬웰 Cromwell〉(1843)이라는 시로 뉴디게이트상을 받았고 1844년 2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평생 옥스퍼드대학교에 대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옥스퍼드대학교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직전의 존 헨리 뉴먼이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널드 자신의 종교사상은 자유주의적이었으나 아널드에게 있어 옥스퍼드대학교와 뉴먼은 항상 정신적인 아름다움과 교양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1847년 존 러셀 경의 자유당 집권동안 고위 각료를 지냈던 랜즈다운 경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1851년 프랜시스 루시 와이트먼과 결혼(1851. 6)하기 위해 안정된 직업으로 장학사 제의를 수락했고, 죽기 2년 전까지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직책이었다.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독일·네덜란드·스위스 등의 교육환경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교육사). 외국 학교사정에 대한 보고서 중 2편은 책으로 발간되었고 국내 교육사정에 대한 연례보고서 역시 세련되고 다듬어진 그의 독특한 글솜씨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문학 업적

아널드를 문학사와 사상사의 중요한 인물로 만든 작품들은 모두 공직을 수행하면서 틈틈이 쓴 것들이다.

첫 시집 〈길 잃은 난봉꾼 외(外) The Strayed Reveller, and Other Poems. By A〉(1849)·〈에트나 산정의 엠페도클레스 외 Empedocles on Etna, and Other Poems〉(1852) 등이 'A'라는 이름 첫자만 밝힌 채 출판되었다. 1853년 본명으로 출판한 시집에는 과거 작품 중에서 선별한 시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왜 〈엠페도클레스〉를 제외시켰는가를 설명하는 유명한 서문이 실려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고통이 있으나 행동으로 옮길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견딜 수는 있으나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상황을 극화한 시이기 때문에 시선집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 서문의 설명이다. 이 서문은 통일성·비개성·보편성·조형능력이라는 고전 가치를 주장하고, 고전걸작들을 '정신적 불안의 시대', 즉 '도덕적 장엄함이 결여된 시대'의 모델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후기비평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시집은 여러 번 판을 거듭해 출판되었고 아널드의 고전비극 〈메로프 Merope〉가 1858년, 〈새로운 시집 New Poems〉이 1867년에 나왔다.

이 시기 이후 작품들의 새 판이 나왔으나 아널드는 거의 운문을 쓰지 않았다. 그의 시 가운데 자신의 비평 기준에서 보아 흡족한 것은 별로 없었다. 고전적으로 균형잡히고, 냉정하고 평정하면서도 장엄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은 내밀하고 개인적이었으며 낭만적 회오, 감상적인 비관주의, 향수로 가득 차 있었다. 공인(公人)으로서 사교계의 인물로서 아널드는 밝고 상냥하며 쾌활했다. 그러나 그 아래 그의 숨겨진 삶의 진면목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영혼의 깊은 심연으로부터/마치 아주 머나먼 땅에서 오듯/노래소리가 들리고 메아리쳐서/우리 생애에 우수를 보낸다."

그는 "30세가 지났고 1/3은 이미 굳어버렸다"라고 1853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시를 쓰고자 하는 충동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빗장이 풀리고 잃었던 감정의 움직임이 되살아날 때'에 생겼다. 비록 그가 '세상의 소용돌이 때문에 마비된 적은 없다'고 하지만, 이러한 통찰력의 시간은 점점 더 드물어지게 되고, 잊혀진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회한, 어린날의 신선함에 대한 그리움, 자기 연민의 분위기, '그의 생명이 피어난 언덕과 그것이 떠나가버린 바다'에 대한 동경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널드의 특징적인 시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맥락의 독백이나 내밀한 고백이지만, 때로는 〈소랩과 러스텀 Sohrab and Rustum〉에서처럼 서사시적인 엄숙함과 냉정함, 〈도버 해안 Dover Beach〉에서처럼 숭엄한 명상, 〈학생 집시 The Scholar Gipsy〉의 지속적인 위엄과 풍부함, 〈티르시스 Thysis〉에서 보이는 미묘한 스탠자 형식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숙함까지도 발휘할 수 있었다.

1857년 그의 대부(代父)인 존 키블의 후임자로 옥스퍼드대학교 시학교수로 임명되어 10년 동안 재직했다.

이 교수직을 혁신시킨 것이야말로 그의 특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의 취임강의 〈문학에 있어 근대적 요소에 대하여 On the Modern Element in Literature〉에는 아널드의 핵심적인 생각이 담겨 있다. 그에게 있어 '근대'란 단순히 '동시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며(그리스도 '근대'였기 때문임), 인생의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광경에 대해 숙고하여 도덕적·지적인 '발산'을 하려는 정신을 의미했다.

그후에도 몇몇 강의가 평론집으로 출판되었으나, 그의 교수 생활의 가장 실속있는 수확은 〈호메로스 번역에 대하여 On Translating Homer〉(1861)라는 3회의 강의집이다. 이 책에서 그는 '병적인 성급함과 분열된 목적'을 가진 근대 세계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호메로스의 단순함과 고상함을 권했고 프랜시스 뉴먼의 호메로스 번역을 시시하고 괴벽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다른 중요한 강의집 〈켈트 문학의 연구 On the Study of Celtic Literature〉(1867)에서는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나 문화사적 지식은 별로 없는 채 켈트 문화의 흐름이야말로 널리 퍼져 있는 비속함과 실용주 의에 맞설 수 있다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비평가로서의 아널드

아널드는 내면의 시인이 죽자 비평가가 살아났다고 한다.

이때 이후 그는 거의 전적으로 산문에 몰두했다. 그의 주요한 사상과 문장들은 〈비평론집 Essays in Criticism〉(1권 1865, 2권 1888)·〈교양과 무질서 Culture and Anarchy〉에 게재되어 널리 읽혀졌다. 1865년 판의 첫번째 평론인 〈현재 비평의 기능 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은 그가 후기 작품에서 좀더 충분히 전개시키게 될 주제들을 거의 모두 간단히나마 다루고 있는 일종의 서곡과 같다.

또한 그가 '비평'에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규모와 의의를 부여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비평의 기능이란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되어진 최선의 것을 배우고 전파함으로써 새롭고 진정한 사상의 흐름을 이루려는 사심없는 노력"이다. 사실 이것이 그가 육성시키려고 하던 정신으로, 문학뿐만 아니라 신학·역사·예술·과학·사회학·정치학 등에서 활동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실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려고' 하는 각성되고 계몽된 지성의 정신이다.

이 비판적인 작업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에 뒤처졌으며 따라서 영국인들은 지방성과 자기만족에 빠진 후진국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아널드의 생각이다. 위대한 낭만파 시인들조차 그들의 창조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이 부족한 데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의 문학비평가는 그 나라 이외의 다른 문학을 알고 유럽의 수준높은 작품들을 접해야만 한다"는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2번째 평론 〈학원의 문학적 영향력 The Literary Influence of Academies〉으로 이어지는데, 이 글에서 그는 정확한 지식과 정확한 취향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생긴 영국 문학의 '지방성의 자취'에 대해 논의를 전개했다.

〈비평론집〉(1865)에 실린 다른 평론들의 제목만 보아도 아널드가 비평의 지평을 얼마나 확장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리스 드게랭 Maurice de Guérin〉·〈유제니 드게랭 Eugénie de Guérin〉·〈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주베르 Joubert〉·〈스피노자 Spinoza〉·〈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등의 평론에서는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처럼 근대적 사상을 문학뿐 아니라 '인생에 적용하여 모든 것들을 19세기의 관점하에 두고' 있다.

1888년 판의 첫 평론 〈시의 연구 The Study of Poetry〉는 원래 T. H. 워드의 시선집 〈영국 시인들 The English Poets〉(1880)의 일반적인 서론으로서 출판되었다.

신념이 무너지는 시대에 시는 종교를 대신할 수 있어야만 한다. 더욱더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인생을 해설해주고 우리를 위로해주고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시와 열등한 시를 구별하고 진정한 시와 속임수를 구별해야만 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저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탐독하여 그들의 '고귀한 진지성'과 뛰어난 어법을 드러내는 어귀를 '시금석'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머지 평론들은 톨스토이와 아미엘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영국 시인들인 밀턴·그레이·키츠·워즈워스·바이런·셸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글들은 기억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각 시인의 '인생 비평'과 근대 정신의 자양분으로서의 그들의 가치를 논하려는 진지하면서도 책임감있는 평가가 들어 있다. 아널드는 그 나름의 판단이나 제거 작업에 열심히 몰두했다.

그는 드라이든과 포프는 영혼에서라기보다는 기지로 글을 썼기 때문에 '진정한 시인'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그레이를 산문과 정신적 황폐기의 '군소 고전시인'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레이·키츠·셸리 등 시 이면의 그 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존 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 무엇보다도 시는 '결국 인생비평'이라고 말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태도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중 마지막 발언에 대해서는 그가 '시적 진실과 시적 아름다움의 법칙에 의해……결정된 조건하에서'라고 덧붙였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하고, 만약 '비평'이란 말은 아널드가 의미했듯이 '가치 평가'로 이해한다면 아널드의 용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양과 무질서〉는 아널드의 가장 주요저작이다.

이 책은 〈비평의 기능〉·〈하인리히 하이네〉에서 보여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독선과 속물근성, 금전숭배에 대한 공격을 확장시킨 것이다. '완전의 연구'로서의 교양은 기준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무질서'와는 대립된다. '우리의 낡은 생각과 습관에 신선한 사고의 흐름을 흐르게'함으로써 교양은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고귀한 정신과 총명함, 뛰어난 예법을 가졌으나 사상을 알지 못하는 야만인, 종교적으로 비국교파의 요새로서 정력과 도덕성은 풍부하나 '달콤함과 빛'은 부족한 속물, 여전히 거칠고 맹목적인 민중이 영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아널드의 분류는 유명하다.

아널드는 속물들인 필리스틴에게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들이 사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집단이므로 그들의 위력은 국가의 위력이고 그들의 조야함이 곧 국가의 조야함이다. 그러므로 필리스틴을 교육하고 인간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널드의 입장이다. 아널드는 사회의 어떤 한 계층이 아니라 '국가'라는 관념 속에 그 나라의 집단적인 '최고의 자아'의 진정한 기관과 저장소가 있다고 보았다.

요약하는 행위는 이 비범한 책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 책은 내면의 평정, 평온한 초연함과 정신적인 조소가 서로 섞여 있기 때문에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서도 읽을 만하며, 이런 점으로 인해 그 책은 빅토리아 사회의 탐색적인 분석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롱의 걸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 책의 속편으로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우정의 화환 Friendship's Garland〉(1871)도 이와 같다.

종교적 저술

말년에 아널드는 그의 평생의 지속적인 관심거리이고 진정한 핵심을 이루는 종교 문제를 다루어 〈성 바울로와 신교 St. Paul and Protestantism〉(1870)·〈문학과 독단 Literature and Dogma〉(1873)·〈하느님과 성서 God and the Bible〉(1875)·〈교회와 종교 Last Essays on Church and Religion〉(1877) 등을 썼다.

이러한 책들에서 아널드는 성공회적인 '근대주의'의 기반을 세웠다. 모든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처럼 그도 두 입장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 한편인 정통파는 그를 무신론자이며 신을 '취향의 흐름'으로 전환시키고 분명한 믿음 대신에 모호한 감정을 주창한다고 비난했다. 다른 편인 무신론자들은 교회에 집착하고 그가 그 기반을 붕괴시켰던 그리스도교 믿음 중 어떤 것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널드는 그의 종교적 저술이 건설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여겼다.

그가 파괴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비평이 낡은 기초를 이미 얼마나 많이 해결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또 그를 소심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종교를 가장 숭고한 형태의 문화, 그것이 없다면 모든 세속의 교육의 헛된 일로 되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그의 입장은 〈하느님과 성서〉의 서문에 씌어진 말로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2가지는 분명히 볼 것이다. 하나는 사람들이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그대로의 종교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민간 신앙 중 많은 것들이 '죽음의 손길을 갖고' 있다고 믿었고, 그 못지않게 종교 없는 인간의 절망을 확신했으므로 그는 종교를 위해 실증적인 근대의 지성들조차도 틀림없이 인정하게 될 '과학적 사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널드의 〈비망록 Note Books〉을 읽어 보면 어떤 독자라도 그의 정신의 깊이와 '숨겨진 생활' 속에서 지속적인 열의와 헌신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깊은 정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아널드는 1888년 봄 리버풀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고 래일엄에 묻혔다. 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삶을 어둡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