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먼

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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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1. 2. 21, 영국 런던
사망 1890. 8. 11, 워릭 버밍엄
국적 영국

요약 19세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성직자·저술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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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옥스퍼드 운동
  3. 개종
  4.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
  5. 정신과 성격

영국국교회옥스퍼드 운동을 이끌었으며 나중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제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유려한 책 〈교구민을 위한 평이한 설교집 Parochial and Plain Sermons〉(1834~42)·〈교회의 예언자적 직무에 대한 강의 Lectures on the Prophetical Office of the Church〉(1837)·〈대학설교집 University Sermons〉(1843)에서 교회의 교리적 권위에 대한 강조를 되살리고 영국 성공회를 5세기까지의 '가톨릭', 즉 보편 교회의 형태로 개혁하라고 촉구하였다. 1845년 무렵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발전한 진정한 현대 교회라고 보게 되었다.

초기생애

1801년 런던에서 태어나 복음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옥스퍼드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교육받은 뒤 1822년 옥스퍼드대학교 오리엘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825년 올번 홀의 부학장이 되었으며, 1828년에는 옥스퍼드에 있는 세인트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가 되었다. 성직자 존 키블과 리처드 허렐 프루드의 영향을 받아 확고한 고교회파가 되었다(고교회는 성공회가 특히 주교직·사제직·성례전에서 고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함).

옥스퍼드 운동

옥스퍼드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뉴먼은 이 운동의 가장 명쾌한 사상을 제공한 유능한 조직가요, 지성적인 지도자였다. 이 운동은 영국 성공회에서 일어난 고교회파 운동으로 영국 성공회의 종교 전통에서 가톨릭 요소들을 강조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1833년 옥스퍼드에서 시작되었다.

뉴먼은 〈시대사조 Tracts for the Times〉의 편집을 맡고 여기에 24편의 논문들을 기고했지만, 이 논문들보다 그가 쓴 책들, 특히 권위에 대한 옥스퍼드 운동의 교리를 진술하여 이 방면에서 고전이 된 〈교회의 예언자적 직무에 대한 강의〉(1837), 마찬가지로 종교적 신앙이론에 대한 고전인 〈대학설교집〉(1843),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구민을 위한 평이한 설교집〉(1834~42)이 이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마지막 책은 출판되어 전국에 보급되면서 운동의 원칙을 가장 잘 대변했다.

1838~39년 뉴먼은 영국 성공회에서 폭넓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당시 새로운 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교회의 교리적인 권위를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뉴먼은 자기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추종자들에게 설교한 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예리하고 때로는 사람을 사로잡는 글을 쓰는 천부적 재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먼은 영국 성공회가 진정한 가톨릭주의를 대표하며, 이 가톨릭주의(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대중적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라고 일컬은 교회들과 대조됨)의 시금석은 분열되지 않은 고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다(→ 성공회 가톨릭 운동).

1834년부터 그의 중간적인 입장은 종교개혁을 경시한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38~39년 뉴먼과 키블이 종교개혁을 맹렬히 비판한 프루드의 책 〈유물들 Remains〉을 출판하자 온건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 뉴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은 1841년 뉴먼이 〈소책자 90 Tract 90〉을 출판함으로써 현실로 나타났다.

이 책은 '39개 조항'을 분열되지 않은 초기 교회의 가르침과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39개 조항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뉴먼의 급진적인 제자 W.G. 워드는 이것이 바로 그의 결론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옥스퍼드의 주교 리처드 배거트는 이 소책자의 배포를 중지시켰다.

잇달아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뉴먼은 점차 고립되어갔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영국 성공회의 보편성에 대한 신념도 약해졌다. 그는 옥스퍼드를 떠나 리틀모어에 있는 자신의 예배당으로 가서 가까운 제자 몇몇을 모아 준(準)수도원을 형성했다.

개종

뉴먼은 1843년 9월 18일 옥스퍼드에 있는 세인트메리 교회를 사임했으며, 1주일 뒤 리틀모어 교회에서 성공회 성직자로서 마지막 설교('친구들을 떠나며')를 했다.

지성적이며 정직했던 그는 초기 교회와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역사적인 차이점을 장애물로 생각하고, 개종하기 전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당시 생물학적 진화론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발전 사상을 깊이 사색한 그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그리스도교 사회에 적용했고, 분열되지 않은 초기 교회가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로 올바르게 발전했다는 점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교리나 예배에서 이 발전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을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색 끝에 거리낌을 극복하고 1845년 10월 9일 리틀모어에서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 개종했고, 몇 주 뒤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고 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를 출판했다.

뉴먼은 로마로 가서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1848년 버밍엄에서 오라토리오회를 세웠다. 엄격한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를 의심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느 정도 자유주의적인 사상(교리의 발전 과정을 표현하는 방식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그의 가르침 등)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전혀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사제로 보낸 초기시절은 적어도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는 1852~53년 도미니쿠스 수도회 사제였다가 변절한 아킬리를 중상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때 아일랜드로부터 초청을 받아 더블린에 새로 생긴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초빙받았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총장직을 수행할 수 없어 〈대학의 이념 Idea of a University〉(1852)이라는 강의를 한 뒤 그 강의집만을 냈다.

로마 가톨릭 월간지 〈램블러 Rambler〉의 편집자로서 그의 역할과 가톨릭 교회 내에 비판적 학문활동을 장려하려는 액튼 경의 노력 때문에 그는 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고, 한때는 함께 옥스퍼드 운동에 참여했다가 곧 웨스트민스터의 새로운 대주교가 된 H. E. 매닝과 결별하게 되었다. 〈교리문제 상담에 관해서 On Consulting the Faithful in Matters of Doctrine〉라는 뉴먼의 글은 이단의 혐의를 받아 로마에 보고되었다. 옥스퍼드에 가톨릭 요양원을 세우려 하였으나 매닝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

뉴먼은 1864년 찰스 킹즐리가 자신의 도덕 사상을 근거없이 공격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좌절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킹즐리는 결국 성공회 교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의 정직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에게 도전한 셈이었다. 비록 킹즐리를 다소 심하게 다루긴 했지만 그 결과 쓰게 된 자신의 종교적 견해의 변천 내력을 다룬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 Apologia pro Vita Sua〉(1864)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넘어서까지 널리 읽히고 인정을 받았으며, 공정하고 솔직하며 흥미롭고 문체가 아름다운 이 책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누리던 국가적 인물로서의 위치를 되찾았다.

비록 매닝이나 매닝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이 자기들이 우려하던 자유주의 정신을 보이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 책을 반기지 않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뉴먼의 지위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확고하게 되었다. 1870년에는 교황무류설에 반대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교리를 신봉했다.

1845년 이래 쓴 책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신학서인 〈동의의 원리 An Essay in Aid of a Grammar of Assent〉(일반적으로 〈The Grammar of Assent〉로 알려져 있음)를 같은 해인 1870년에 출판했다. 이 책에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개연적일 뿐인 증거에서 신앙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1879년 레오 13세는 뉴먼을 벨라브로에 있는 세인트조지 성당의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뉴먼은 1890년 버밍엄에서 죽은 뒤, 가장 친했던 앰브로즈 세인트 존과 함께 오라토리오회의 휴양지 레드널에 묻혔다.

정신과 성격

뉴먼의 초상화들을 보면 예리함과 심미적 섬세함이 엿보인다. 시인이기도 했던 뉴먼은 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에서 아주 유명한 시들은 대부분 그가 성공회 신자였을 때 〈사도의 서정시 Lyra Apostolica〉에 기고한 시들로, 이중에는 1833년 배를 타고 가다가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사이의 해협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멈추었을 때 지은 〈빛으로 인도하소서 Lead, kindly light〉라는 찬송과, 추도미사에 근거하여 지은 〈게론티우스의 꿈 The Dream of Gerontius〉(1865)·〈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찬양하라 Praise to the holiest in the height〉·〈나는 확고하고 진실하게 믿나이다 Firmly I believe and truly〉 같이 잘 알려진 찬송들이 있다. 또한 철학자나 신학자로서 그의 사상도 시적인 정서와 관련되었다.

산문에는 한계가 있음을 늘 인식하여 비유와 유비의 필요성을 의식했다. 따라서 논리적인 신학자들은 그의 사상이 난해하거나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에는 아리스토텔레스, 데이비드 흄, 주교 조지프 버틀러, 리처드 웨이틀리를 연구하여 얻은 통찰력과 원동력이 있었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논리학과 변증법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상이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지적 결함은 오히려 지나친 예민함에 있었다.

그는 꼼꼼하게 논증하기를 좋아했고, 때로는 아주 정교한 자기 논리에 스스로 휘말려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위험한 입장에 처했을 때에는 귀류법(歸謬法)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 뉴먼 사상의 정수는 〈교구민을 위한 평이한 설교집〉이나 〈대학 설교집〉의 몇 군데서, 그리고 가장 조야한 면은 1843년에 출판된 〈교회의 기적들에 대한 논고 Essay on Ecclesiastical Miracles〉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섬세한 성품은,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그와 사귀게 된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대중의 비판에 쉽게 상처를 받고 증오심을 품었다. 또한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성공회 교도 또는 그의 가톨릭 신학을 공격하는 교황지상주의자 등 반대파들로부터 의심을 받으면서 겪은 좌절감 때문에 자신감을 많이 잃었고, 따라서 충분한 자질이 있었으면서도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옥스퍼드 운동을 일으켜 영국 성공회를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며, 가톨릭 신학이 새로운 비판적 학문의 연구결과들에 보다 개방적이 되도록 도왔다.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은 영국 성공회 교인들이 가톨릭 사제들에 대해 품었던 노골적인 편견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 교회와 영국 성공회에 끼친 뉴먼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