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국교회

영국국교회

다른 표기 언어 Church of England , 英國國敎會

요약 2세기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뒤 생긴 성공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세의 영국교회와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교회행정·전례·관습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틀을 귀중히 여기며 보존하고 있다. 영국국교회는 주교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는 캔터베리와 요크의 2개 관구로 나누어져 있다. 관구의 지도자는 대주교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서열상 위에 있다. 관구는 주교가 지도하는 교구로 나누어지고, 교구는 다시 몇 개의 소교구로 나뉜다. 원칙상 사제를 돕도록 되어 있던 여성 부제는 1987년 처음으로 서품을 받아 감사성찬례 집전을 제외한 모든 성직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2세기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뒤 생긴 성공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세의 영국교회와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교회행정·전례·관습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틀을 귀중히 여기며 보존하고 있다.

5세기 로마의 영국 통치가 끝나면서 침입하기 시작한 앵글로색슨족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파송한 로마의 수도사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노가 영국에 도착한(597) 뒤 약 90년이 흐르는 사이 영국의 모든 색슨 왕국은 점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종교개혁 전까지 영국 교회는 진보와 쇠퇴를 겪었다. 8세기 영국의 학문수준은 상당했으며, 몇몇 영국교회 성직자들은 유럽에서 학자·개혁가·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뒤 덴마크의 침입으로 수도원은 파괴되고 학문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웨식스 왕들이 영국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자 교회는 다시 개혁되기 시작했다. 11세기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하자(1066), 영국은 라틴계 유럽 문화에 보다 가까워졌다. 영국 교회는 로마의 견해에 따라 개혁되었는데, 지역교회회의가 부활되었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이 요구되었으며, 서부 유럽의 교회법이 도입되었다.

중세기에 영국의 성직자와 평신도는 서방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는 중세 후기의 특징인 종교적 불안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14세기 종교개혁가이며 신학자인 존 위클리프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혁명적인 비판자였으며,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평가된다. 헨리 8세(1509~47)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여 독립된 영국국교회를 세웠다(로마 가톨릭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헨리 8세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영국의회는 헨리 8세를 돕기 위해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켰으며, 1534년에는 영국의 왕을 영국국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만들었다(수장령). 이때문에 수도원은 탄압을 받았으나 그밖의 다른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는 비록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시켰지만,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죽은 뒤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6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의 이복동생이며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메리의 박해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었을 때 독립된 영국국교회가 다시 세워졌다.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1549)와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1571)은 전례와 교리의 기준이 되었다. 17세기 청교도운동은 영국 내란(1642~51)과 공화정 수립(1649~60)의 계기가 되었다.

왕정과 영국국교회는 탄압을 받았으나 1660년 모두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이 로마 가톨릭의 유산을 강조한 반면, 18세기의 복음주의운동은 영국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 유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2가지 유산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각각 고교회파(High Church)와 저교회파(Low Church)로 불리기도 했다. 20세기 영국국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국교회는 주교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는 캔터베리와 요크의 2개 관구로 나누어져 있다.

관구의 지도자는 대주교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서열상 위에 있다. 관구는 주교가 지도하는 교구로 나누어지고, 교구는 다시 몇 개의 소교구로 나뉜다. 원칙상 사제를 돕도록 되어 있던 여성 부제는 1987년 처음으로 서품을 받아 미사집전을 제외한 모든 성직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캔터베리 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