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기도서

성공회 기도서

다른 표기 언어 The Book of Common Prayer , 聖公會祈禱書

요약 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서.

1549년 영국국교회에서 사용하도록 공인된 이후 1552년에 크게 개정되었고, 1559, 1604, 1662년에 소폭으로 개정되었다. 1662년의 기도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대부분의 영국연방 성공회에서 표준 예배의식서로 계속 사용되었다. 영국연방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성공회는 그들 나름대로 다양한 기도서를 가지고 있다.

1549년의 첫번째 통일령으로 법령화된 〈에드워드 6세의 첫번째 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of Edward VI〉는 1533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가 기초했다.

이것은 구사상과 신사상을 절충했으며, 외교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가르침 내용을 모호하게 한 부분도 있었고 보수파와 극단적인 개혁파 모두 이 기도서에 반대했다. 개혁파가 우세하게 되자 1552년 〈에드워드 6세의 2번째 기도서 The Second Prayer Book of Edward Ⅵ〉가 나왔다. 이 개정판은 기도서 내용이나 의식이 프로테스탄트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1553년 가톨릭교도인 메리 여왕이 옛 라틴어 예배의식서를 부활시켰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된 후 2번째 통일령(1559)에 의해 1552년의 기도서가 부활되었는데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임재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고, 교황을 공격하는 기도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작지만 중요한 수정을 가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만족하지 않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햄프턴 법정협의(1604)에서 다시 개정을 요구하여 결국 1604년의 기도서가 나오게 되었다.

영국 내란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자 영연방과 보호령에서는 더이상 기도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 뒤 개정된 기도서가 채택되었는데(1662), 내용상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1688년 영국 혁명이 일어난 뒤 영국국교회와 청교도들을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도서의 개정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실패로 돌아갔고, 20세기가 되기까지 더이상 개정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1927~28년의 개정은 논란이 많았는데, 의회는 성체성사 집행과 관련된 변경안이 '로마 가톨릭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개정을 거부했다. 그러나 영국성공회와 성공회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당시 널리 쓰이던 언어로 된 실험적인 의식서를 발전시켰고 많은 논란을 거친 후에 1970년대말 영국성공회와 미국성공회가 이 기도서를 정식으로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