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랜머

크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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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89. 7. 2, 잉글랜드 노팅엄셔 애슬랙턴
사망 1556. 3. 21, 옥스퍼드
국적 캔터베리

요약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캔터베리 대주교(1533~56),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고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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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왕을 도와 일함
  4. 캔터베리 대주교
  5. 에드워드 6세 때의 업적
  6. 이단재판
  7. 순교
  8. 평가
크랜머(Thomas Cranmer)
크랜머(Thomas Cranmer)

개요

대주교로서 관구교회로 하여금 영어성서를 사용하게 했고, 〈성공회 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 초안을 작성했으며, 오늘날도 쓰이는 호칭기도서(litany)를 썼다(영국국교회, 성공회, 개신교, 종교개혁, 로마 가톨릭교). 프로테스탄트를 장려했다는 이유로 가톨릭교 여왕인 메리 1세에게 폐위당한 뒤 이단으로 단죄되어 화형당했다.

초기생애

토머스 크랜머와 애그니스(결혼 전 성은 해트필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젠트리 하층에 속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재산이 장남 존에게 물려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랜머와 동생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엄하고 가혹했던 교장'에게 배웠는데, 훗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에게 배우는 동안 불안정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성격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1503년 소년 크랜머는 케임브리지로 갔다. 1510(또는 1511)년 지저스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으나, 돌핀 기숙사 여주인의 친척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 기간 동안 아내를 돌핀 기숙사에 남겨둔 채 버킹엄(훗날의 마그덜리너) 칼리지에서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환경 때문에 훗날 그가 여관 마부로 생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러나 아내는 출산 도중에 죽었고, 그뒤 지저스 칼리지로부터 특별연구원 직위를 다시 받았다. 이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 비록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폭넓은 지식을 갖춘 당대에 손꼽히는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520년경부터 루터의 반란으로 제기된 신학문제들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하는 학자들 모임에 가입했다.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작은 독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훗날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게 될 이 모임에는 윌리엄 틴들, 로버트 바니스, 토머스 빌니, 크랜머가 있었는데, 그는 1525년 무렵 대표기도 때 잉글랜드에서 교황권을 폐지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왕을 도와 일함

일찍이 개혁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교육 배경 및 취향과 맞지 않던 정치 사건들에 휘말려 드는 일이 없었다면 그 열망은 학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1527년부터 헨리 8세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첫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와 이혼을 추진했는데, 1529년 그 '이혼'이라는 수레바퀴에 크랜머도 말려들게 되었다. 그해 8월 땀을 흘리는 병으로 알려진 전염병이 잉글랜드를 휩쓸었고, 케임브리지에서는 더욱 심했다.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서 크레시라는 두 형제(이들은 어머니를 통해 크랜머의 제자가 되었음)와 함께 케임브리지를 빠져나와 에식스 월샘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때 왕이 그 근방을 방문하고 있었다. 곧 왕의 고문관인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는 왕의 임시숙소에서 크랜머를 만나 왕이 계획하고 있는 이혼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과거에는 죽은 형의 미망인과 혼인하는 것이 적법한 일인지 교회법학자들과 대학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그는 왕이 그런 결혼을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표시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국내 신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을 주장했다.

아무리 무명인사라 할지라도 뛰어난 두뇌와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도움을 받고 싶어하던 헨리는 크랜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본 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자신의 이혼문제에 전념하라고 명령했다.

크랜머가 받은 임무는 왕의 계획을 진술하고 그것을 성서, 교부들의 가르침, 여러 공의회의 법령에 근거하여 옹호하는 방식으로 왕의 입장을 선전하는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왕의 소개로 윌트셔의 백작인 앤 불린 아버지의 환대를 받았고, 한동안 더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지냈다. 그뒤 톤턴의 대부제로 임명되었고, 왕의 전속사제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교구의 성직록도 받았다.

논문을 완성한 뒤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로부터 그 내용을 변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그의 논지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그가 자리를 뜨자 결국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는 이미 고등법원은 아닐지라도 영향력이 컸던 법정에서 왕을 변호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있었다. 윌트셔 백작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1530년 로마로 파견되었고, 크랜머는 이 사절단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잉글랜드의 내사원장(內赦院長)에 임명되었으나, 이혼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532년 독일 황제 카를 5세에게 공식사절로 파견되었으나, 이때 받은 임무는 루터파 제후들과 관계를 트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를 사귀었는데, 신중한 성품의 크랜머는 루터와 이전의 정통 신앙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의 신학 견해가 마음에 들었고, 또한 그의 조카 마르가레테는 오랫동안 원하지 않던 독신생활을 해온 그의 마음에 훨씬 더 강하게 와 닿았다.

크랜머는 사제였는데도 1532년 그녀와 결혼했으며, 이때부터 신학 견해도 개혁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1532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해였다.

그해 8월 연로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이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국왕의 수입증대를 위해 관례대로 한동안 공석을 유지했으나, 그해말에는 이혼문제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공석으로 둘 수 없게 되었다. 마침 토머스 크롬웰이 교회문제담당 수석고문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정책이 예고되던 상황에서 1533년 1월에는 로마에 항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 초안이 작성되고 있었고, 앤 불린은 임신중이었다.

유력한 대주교 후보였던 스티븐 가디너가 신망을 잃자 왕은 크랜머를 선택했다. 1533년 3월 크랜머는 교황으로부터 승인칙서를 받고 순종서약을 한다고 선언한 뒤 축성을 받고 캔터베리 대주교로 즉위했다. 그뒤 왕이 기대하던 일을 수행해 가는 가운데 5월 던스터블에서 재판을 열어 왕이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한 결혼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공포한 다음 앤 불린과의 재혼은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1536년 이번에는 앤이 간통을 저질렀다는 모호한 증거를 사실로 인정하고서 그 결혼을 무효로 공포했고, 1540년 헨리 8세가 4번째 아내 클레비스의 과 이혼하는 일을 도왔으며, 1542년 캐서린 하워드를 반역성 간통죄로 처형하기로 한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크랜머는 위와 같은 많은 논란을 빚은 쟁점들에 대해서 분명히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했겠지만, 나타난 결과를 보면 어쨌든 왕의 지시대로 그 결혼정책을 수행해나간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재조직된 교회에서 대주교로서 행한 활동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출세를 꿈꾸지는 않았다. 대주교로 승진하기 직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은 성직자로서 출세를 꿈꾸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로, 만일 출세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인정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던 아내는 장애물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1548년 전까지는 아내를 공개적으로 밝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내를 공기구멍이 있는 궤 속에 넣어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생긴 천박한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권좌에 앉게 되자 그 결과들을 피할 수 없었다.

대륙의 신학적 변화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확신에 찬 종교개혁자였던 그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주인 밑에서 영국국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크롬웰과 협력하여 영어성서 발행을 장려했고, 1538년에는 크롬웰의 강제명령으로 교구들에 영어성서 사용을 의무화했다(성서번역).

이미 헨리 8세가 죽기(1547) 전부터 크랜머는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고, 1545년 잉글랜드 개혁교회를 위해 호칭기도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그가 남긴 걸작들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까지도 쓰인다.

1538년에는 이미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說: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외형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본질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을 단념했으나,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실재로 임재한다는 신앙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미 1536년 북부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를 주도적인 혁신자로 인정했다.

따라서 1539년에 성직자 결혼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화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6개 조항이 공포되고, 1540년 크롬웰이 실각하자 크랜머는 매우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헨리의 말년에 크랜머의 적들은 적어도 3번이나 그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제거하려고 치밀한 음모를 꾸몄지만, 그때마다 헨리가 이상할 정도로 그를 감싸주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헨리는 왕으로서 신하들과 고문들에 대해 철저히 개인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크랜머에 대해서만큼은 신뢰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대주교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탐욕스럽거나 교활하지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았고, 왕의 총애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홀로 변호했으며(비록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토머스 모어 경, 앤 불린, 토머스 크롬웰, 그외 사람들을 위해 탄원했음), 기적적으로 헨리의 총애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왕은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대할 때 생기는 외경심과 즐거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대했다. 그를 좋아하고 그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감싸주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헨리가 임종 때 그에게 의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6세 때의 업적

에드워드 6세(헨리가 3번째 부인 제인 시모에게서 낳은 외아들)가 즉위함과 동시에 크랜머의 때가 찾아왔다.

어린 왕의 후견인 서머싯의 공작 에드워드 시모는 처음부터 영국국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꾸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1549년 그가 실각했을 때 예상되던 가톨릭의 반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모를 축출한 존 더들리(훗날 노섬벌랜드 공작이 됨)가 훨씬 더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펼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필요했던 교리작업에서 크랜머는 앞장서서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1547년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설교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악평 섞인 불만에 대처하기 위해 〈설교집 Book of Homilies〉을 펴냈다. 1549년 온건한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띤 최초의 기도서를 펴냈고, 1552년 더욱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밝힌 2번째 기도서를 펴냈다. 이 작업의 많은 부분을 직접 맡아서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외국 신학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잉글랜드는 이들에게 마치 자석과도 같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마르틴 부처로, 그의 성찬에 관한 견해는 특히 2번째 기도서의 성찬식 부분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크랜머를 설득하여 1547년까지 지켜온 루터주의에서 탈피하게 만든 사람은 부처라기보다는 폴란드의 소(小)얀 라스키이거나 잉글랜드인 니콜라스 리들리였는데, 이 두 사람은 대주교보다 더욱 단호하고 망설이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대에 크랜머는 당대의 종교논쟁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교리 입장을 규정짓는 교리진술서인 42개조(1553)를 공포했다. 모든 성직자, 교수, 학위취득 신청자들은 의무적으로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 문서는 훗날 39개 조항으로 줄었고, 영국국교회에 의해 정식 채택되었다.

또한 이무렵 크랜머는 영국국교회의 교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다가 1571년 〈교회법 개정 Reformatio Legum Ecclesiasticarum〉으로 출판되었다. 당시까지도 국가행정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그는 학문·권위·성실함으로 국가의 혁명을 주관하고 이끌었다. 또한 영국국교회의 교리·의식·법을 정착시켰다. 무엇보다도 영국국교회는 그 덕분에 아름다운 전례서를 갖게 되었는데, 이 전례서를 통해 그가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단재판

에드워드 6세의 임박한 죽음(1553. 7)은 마침내 크랜머를 정치에 말려들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거부하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왕의 강요에 못이겨 노섬벌랜드가 왕위계승권을 메리 공주(헨리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서 낳은 딸)에게서 자신의 며느리이자 헨리의 종손녀인 제인 그레이 부인에게 넘기기 위해 관례, 성문법, 헨리 8세의 유언을 변경할 계획으로 작성한 문서에 서명했다. 제인 그레이 부인은 여왕으로 선포되었지만 9일 만에 폐위당했고,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크랜머는 반역죄로 고소당하고, 1553년 11월 메리 정권에게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도 이미 그에게는 더이상 밝은 전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메리의 즉위로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한동안 무너져내렸다. 크랜머의 철저한 원수 스티븐 가디너가 즉시 감옥에서 풀려나 대법관이 되었고, 1554년 11월 추기경 레지널드 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여 이단 처형을 지휘했다.

크랜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운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여왕과 고문들은 노섬벌랜드의 어리석은 음모를 지원했다는 기술적인 죄를 가지고 그를 처형할 마음이 없었고,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교도를 장려해온 이유를 가지고 처형하려 했다. 이들은 의회에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법령들을 철회하게 하고, 국왕의 군대가 이단들에 대해 화형을 집행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을 다시 도입하게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크랜머는 리들리와 과거 우스터 주교를 지낸 프로테스탄트교도 휴 래티머와 함께 1554년 3월 자신의 대학교보다 반종교개혁에 대한 반발이 적었던 옥스퍼드로 이송되었다.

그해말 이단에 대한 법령들이 채택되었고, 1555년 9월 오랫동안 감옥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크랜머는 오래 계속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서 성사(聖事)와 교황권에 대한 과거의 입장에서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벗어났다는 고소에 대해 단호히 자신을 변호했다. 여러 절차를 거친 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론이 내려졌고, 1556년 2월 14일 그를 모욕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의식에서 대주교 및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결국 당국에 넘겨졌다.

순교

그러나 메리 정부는 그를 쉽게 처형하지 않았다.

이단의 괴수를 화형에 처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자인하게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꺾으려 했다. 전 해 10월 크랜머는 리들리와 래티머의 순교장면을 강제로 지켜본 바 있는데, 이제 정부당국자들은 그를 잠시 감옥에서 쾌적한 환경으로 옮겨 놓은 뒤 과거의 자신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크랜머는 이른바 철회서라고 하는 5개의 문서들에 서명했는데, 그중 처음 4개 문서는 잉글랜드 사람이면 누구나 과거에 왕과 의회가 법령으로 포고한 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자신의 일관된 신념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국자들은 이러한 그의 신념을 이용하여 메리의 반종교개혁의 유효성을 논리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크랜머가 반종교개혁을 인정한 데에는 허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사형이 연장되고 있고 또 혹시 사면받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이 분명히 작용했으며, 이런 희망을 가지고 마침내 굴욕적으로 자신의 신앙 경력을 철회(6번째)하고 말았다.

정부는 크랜머의 변절 선언이 잉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크랜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가디너가 죽었는데도 메리 여왕과 폴 추기경은 반드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결과 1556년 3월 21일 크랜머는 화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직전에 대중 앞에서 철회사실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안 그는 믿음과 위엄을 되찾았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고, 다만 영혼의 평안만 얻으면 되었기에 철회사실을 부인한 뒤, 교황의 권력은 그리스도에게서 찬탈한 것이며 화체설은 거짓이라고 강력히 재천명함으로써 적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크랜머는 정부가 선전활동을 통해 이룩한 모든 것을 단숨에 허물어뜨렸고, 살아남아 있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용기를 되찾아주었다. 그런 다음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잘못된 철회서에 서명함으로써 '죄를 지은 오른손'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끝까지 치켜든 채 죽었다.

그의 용감하고 위엄에 찬 최후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가

크랜머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그처럼 많은 시련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악평을 받아왔다.

본질상 학자였던 그는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에게 집요함과 열정을 주입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도덕 관념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그가 마지막에 의심을 가졌던 것은 고문으로 교묘히 주입된 것이며, 종교개혁 기간 동안 대대로 내려온 정통신앙에서 점점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발전해간 사실은 충동보다는 이성에 순응한 그의 신앙 경력을 잘 보여준다.

크랜머는 언제나 배우는 태도를 취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위성직을 꿈꾸지도 않았고, 고위성직자가 된 다음에도 그 직위를 향유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 직위가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다. 자기를 중상하는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거나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한번은 크롬웰이 화를 내면서 '교황의 깡패들'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눈과 목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크랜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그 예언을 일축했다.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하던 시절에 요안 보처의 재판과 화형(1550)에 가담한 것을 제외하고는 박해에 관여하지 않고 관대한 태도를 유지했다. 요안 보처가 단죄당한 이유도 아리우스주의와의 투쟁이 끝난 이래 모든 교회가 용납할 수 없는 죄로 간주해온 삼위일체에 대한 부정과 노골적인 신성모독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크랜머는 교회의 권위를 크게 존중했는데, 이를테면 그가 개정한 교회법에 그런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종교적 신념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비록 국가를 숭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가끔 제기되는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입장 때문에 왕 앞에서 굽신거리지는 않았다. 헨리 8세의 고문들 가운데 오직 그만이 왕의 총애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변호했으며, 1543년 '왕의 책'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을 때 왕의 신학과 문법을 신랄히 비판한 사실은 그의 용기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섬벌랜드 앞에서 기가 죽어 있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용감하게 대항했다. 이상의 사실들은 그가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참으로 교리적인 신조로 여겼다는 사실을 강조해준다. 이런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관성이 있었지만, 그것은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던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 것일 뿐이었다. 그를 인도한 또하나의 별은 신학연구였다.

신학연구에 있어 중세말 스콜라주의의 무미건조한 영향을 떨쳐버리고 대신 성서와 초기 교부들을 연구했다. 그는 왕이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믿었으며, 이로써 당대의 전형적인 영국국교도, 즉 영국의 개혁파 교회의 지적이며 영적인 설립자이자 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