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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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91. 11. 11, 알자스 슐레트슈타트
사망 1551. 2. 28, 잉글랜드
국적 종교개혁가

요약 서로 대립하고 있던 종교개혁 집단들 사이에서 화해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성공회의 예배의식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부처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인문주의 견해에 바탕을 둔 인간과 사회의 쇄신을 마음속에 그렸으며, 참된 복음을 전하고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주신 삶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부처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희망을 품기도 했는데, 그가 자유주의적인 몇몇 가톨릭 성직자들과 여러 차례 협상을 가진 이유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 시가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협정을 채택하는 것에 반대함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 간 그는 영국국교회에서 있었던 몇 차례 타협에서 중재자로 나서는 등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처(Martin Bucer)
부처(Martin Bucer)

서로 대립하고 있던 종교개혁 집단들 사이에서 화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성공회의 예배의식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색인:개신교, 루터교).

1506년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가입했고, 그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유학하여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지도자 마르틴 루터의 저서들을 통달했다.

1521년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 탈퇴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7인 선제후(選帝侯) 가운데 하나인 라인의 팔라틴 백작을 도와 일했다. 이듬해 란트슈툴의 주임사제가 되었고, 그곳에서 전에 수녀였던 여인과 결혼했다. 1523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뒤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부모의 시민권에 힘입어 보호받으며 자신의 인격·지식·열정을 인정받아 스트라스부르와 독일 남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에라스무스에게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이상을 받아들여 일반 인문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과 사회 안의 참된 선(善), 본연의 의(義)의 거듭남을 요구했다. 그는 유럽 북부에 급속히 퍼지고 있던 종교개혁의 열정에 사로잡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품고 있던 인문주의 견해에 바탕을 둔 인간과 사회의 쇄신을 마음속에 그렸으며, 참된 복음을 전하고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주신 삶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회개·경건·훈련을 통한 이러한 개혁은 그가 1551년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6세에게 제출한 영국 종교개혁을 위한 광범위한 계획서에 충분히 표현되었다.

그를 받아들인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매우 유명한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독일 남부 및 스위스와, 루터에게 영향을 받은 독일 북부의 중간에 있었다. 1524년 이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예식에서 중심이 되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구절의 뜻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색인:화체설). 1529년 헤센의 백작영주 필리프에게 소환을 받은 이 두 사람과 그밖의 개혁자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회담을 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내세웠고, 츠빙글리는 인문주의자들이 널리 받아들이던 영적 해석을 주장했으며, 부처는 대립되는 이 2가지 견해를 일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회담 끝에 츠빙글리와 부처가 루터에게 우의(友誼)의 악수를 청했을 때 거절당했다.

부처는 이 두 개혁운동을 중재할 수 있다고 믿고 1524~48년에 독일과 스위스에서 열린 거의 모든 종교회의에 참여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혹은 독일 루터파와 스위스 개혁파 성직자들 사이에 벌어진 여러 회의에서 부처는 양측으로부터 명백한 의견 일치를 얻어낼 수 없을 경우에는 불확실한 용어와 모호한 표현을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궁극적인 목표가 사람들을 개혁하는 데 있으며, 교리 문제는 후에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536년에 바젤에서 제1차 헬베티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데 참석했는데, 이 고백서는 성찬 교리에서 지나치게 루터의 견해 쪽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처는 같은 해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열린 루터파 신학자와 개혁파 신학자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에는 당시 그와 자주 비교되던 루터파 인문주의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도 참석했다. 처음 얼마 동안 부처와 멜란히톤은 대륙의 종교개혁을 크게 두 파로 갈라놓은 성찬 논쟁을 해결한 듯했다. 이를 본 루터는 두 사람의 영향에 힘입어 뚜렷한 일치를 얻게 되는 것으로 여기고 만족하여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주 안에서 귀한 형제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부처는 루터의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뒤 멜란히톤은 이 일치를 구체화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협정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부처와 멜란히톤의 의도와는 달리 그 협정은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스위스인들은 부처가 실제적 임재의 교리 쪽으로 양보한 데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했고, 몇몇 사람들은 비텐베르크 협정에 담겨 있는 그의 진술을 공식 철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처는 츠빙글리 추종자들과 루터의 추종자들이 논쟁을 벌였을 때 그 사이에서 논쟁을 피하고 쟁점들을 감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독일 남부의 여러 제후들은 지역 제후들이 만든 칙령에 기초한 타협안을 마련하면서 부처에게 자문과 지도를 구했다. 부처는 이 타협안을 각 지역 형편에 맞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파벌로부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신도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이 타협안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며, 그 이상의 변화가 차츰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변명했다. 부처가 취한 타협에 의한 일치 정책은 종교 관용 문제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부처의 정책을 받아들인 스트라스부르 지역에서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재세례파(초기 종교개혁 좌파로서 정치·사회 조직에서 혁명적인 사상을 주장함)와 그밖의 소수 집단에 대한 박해가 덜했다.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하려는 부처의 정책은 헤센의 필리프의 중혼(重婚) 사건으로 쟁점의 대상이 되었다. 필리프는 루터, 부처와 그밖의 여러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한 헤센의 백작영주일 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제3자의 입장에서 그에게 이혼하라고 충고할 상황도 아니었다.

부처는 〈구약성서〉의 중혼 관습을 내세워 루터, 멜란히톤과 그밖의 사람들에게 필리프의 2번째 부인을 인정해달라고 설득했다. 결국 필리프의 중혼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거짓 방법이 사용되었고, 이 문제로 종교개혁자들은 명예에 큰 손상을 입었다.

부처는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외에도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차이점을 보완하고자 자유주의적이고 개혁지향적인 몇몇 가톨릭 성직자들과 여러 차례 비밀 협상을 가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투르크인들이 유럽 중부를 침입해올 것을 두려워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일 제후들 사이의 통일을 원했기 때문에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회의를 소집했다. 카를 5세는 가톨릭 신학자 3명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3명(부처를 포함)을 선정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일치를 위한 몇 가지 단계를 제시해놓은 익명의 레겐스부르크서(書)를 가지고 논의하도록 했다. 부처가 자유주의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비밀 협상에서 많이 양보한 사실을 카를이 이용하여 종교개혁 논쟁을 공식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자, 크게 놀란 부처는 일치 계획에 가담한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레겐스부르크서를 거부하자, 카를 5세는 무력을 사용하여 종교 타협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억누름으로써, 또한 자기가 마련한 1548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협정을 맺음으로써 한동안 그 문제를 가라앉혔다.

부처는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협정이 이전에 자신이 내놓았던 타협안보다 가톨릭에 더 많이 양보하지 않았는데도 스트라스부르 시가 이를 채택하는 것에 대해 열렬히 반대했다.

비록 빈약한 타협안일지라도 개혁을 지향한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만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협정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오히려 퇴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의 군대 앞에서 스트라스부르 시는 부처와 다른 여러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을 추방했으며, 이들은 모두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의 배려로 영국으로 갔다.

부처는 그곳에서 츠빙글리파인 존 후퍼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가 이끄는 보다 급진적인 영국교회 개혁운동에 맞서, 크랜머와 학자 니콜라스 리들리가 추구하던 공식적이고 신중한 개혁 계획을 지지했다. 또한 부처는 루터파의 영향을 받은 영국국교회의 새 전례서 〈에드워드 6세의 첫번째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of Edward Ⅵ〉(1549)를 공식적으로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영어를 몰랐으나 죽기 1개월 전에 평가서 〈켄수라 Censura〉를 주교 엘리에게 제출하여 그 전례서가 은연중에 루터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의 평가를 참고하여 만든 〈에드워드 6세의 두번째기도서 The Second Prayer Book of Edward Ⅵ〉(1552)는 영국국교회 보수주의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했으나 8개월 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영국국교회에서 있었던 몇 차례의 타협에서 중재자로서 부처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