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

다른 표기 언어 Desiderius Era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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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69. 10. 27,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536. 7. 12, 스위스 바젤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 출신의 인문주의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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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방랑
  3. 에라스무스와 프로테스탄트의 갈등
  4. 말년
  5. 영향과 업적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신약성서〉를 최초로 편집했고, 교부학과 고전 문학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개척한 문헌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특히 그리스어 〈신약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연구에서 과거에 대한 역사적·비판적 연구의 토대를 이루어 놓았다.

그의 교육에 관한 저술은 형식에 치우친 과거의 교과과정을 지양하고 인간성을 중시하는 고전문학을 새롭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교회의 악폐를 비판하고 먼 옛날의 좋았던 시절을 강조함으로써, 점증하는 개혁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 욕구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도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앙고백을 통한 격렬한 논쟁의 시대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태도(그는 마르틴 루터의 예정설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황이 주장하는 권력도 인정하지 않았음)를 유지했기 때문에 양쪽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는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신앙의 정통성보다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비추는 횃불이 되었다.

초기생애

에라스무스는 성직자인 로헤르 헤라르트와 의사의 딸인 마르가레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사생아였으며, 네덜란드 데벤테르에 있는 성 레부인 성당의 부속학교에 들어가 3학년까지 진급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얀 신텐과 교장 알렉산데르 헤기위스는 모두 인문주의자였다.

에라스무스는 학생시절에 고전 라틴어 시를 쓸 만큼 총명했는데, 근대의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그가 세계시민주의자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모가 죽은 뒤 에라스무스 형제의 후견인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단체가 운영하는 헤르토헨보스의 학교로 두 소년을 보냈다. 이 단체는 수도사를 육성하는 평신도들의 종교운동 단체였다. 에라스무스는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소년의 기백을 꺾는 가혹한 징계 때문에 이 학교를 기억하기도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형제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에라스무스는 호우다 근처의 스테인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정규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약 7년(1485~92) 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스테인에 있는 동안 순수 고전어법에 대한 해설이자 고전어법을 타락시킨 '야만인' 학자들을 비난하는 선언문인 로렌초 발라의 〈Elegantiae〉를 알기 쉽게 의역했다. 에라스무스의 수도원 선배들은 그의 고전 연구를 방해함으로써 그에게 '야만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에 임명된(1492. 4) 뒤, 영향력있는 캉브레 주교인 베르겐의 앙리가 제의한 라틴어 비서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수도원을 벗어났다. 1494~95년의 개정판으로 남아 있는 그의 〈야만성에 반대하는 글 Antibarbarorum liber〉은 이교적인 고전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주장을 거듭 주장하고 그가 떠나온 수도원 생활을 혹평했으며, '건전한 학식은 모두 비종교적인 학식'이라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궁정 신하의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캉브레 주교가 그를 파리대학에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했을 때(1495)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몽테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수도원과 비슷한 그 기숙사의 관리체계를 싫어했고 스코투스주의에 대한 강연을 들을 때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고전 연구에 도움을 얻기 위해 제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 시기(1497~1500)에 오래지 않아 유럽 전역의 인문주의 학교에서 쓰이게 된 우아한 라틴어 교재(〈대화집 Colloquia〉·〈격언집 Adagia〉을 포함)의 초판이 나왔다.

방랑

1499년에 에라스무스는 제자인 마운트조이 경 윌리엄 블런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토머스 모어를 만나 평생 동안 변치 않은 우정을 맺었다. 에라스무스는 성서를 형식주의자들처럼 논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직도 고전적인 수사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시대에 살았던 성 예로니모나 그밖의 그리스도교 교부들처럼 해석하는 '원시적 신학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영국에서 만난 존 콜릿은 그의 이런 야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열정적인 콜릿은 그에게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하라고 열심히 권했지만, 신중한 에라스무스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고대 신학'을 연구하려면 그리스어에 숙달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고, 라틴어로 씌어진 바울로 서신을 들고 유럽 대륙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아르투아를 방문했을 때(1501) 에라스무스는 열렬한 설교자인 장 부아리에를 만났다.

부아리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였지만, '수도원 생활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생활'이라고 에라스무스에게 말했다. 숭배자들은 부아리에의 제자들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마지막 종교의식이 주는 신성한 위안을 얻지 않고도 하느님을 믿고 얼마나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부아리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교부인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에라스무스에게 빌려주었다.

그리스 출신의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에 뿌리를 둔 우의적이고 정신적인 성서 해석법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1502년에 에라스무스는 이미 루뱅(브라반트 주)이라는 대학 도시에 정착하여 오리게네스와 바울로의 저서를 그리스어로 읽고 있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그리스도교 병사의 필독서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3/04)였다.

이 저서에서 에라스무스는 '고대인'들이 좋아한 정신적 해석을 이용하여 성서를 도덕적 관심사에 적합하게 만드는 한편, 성서를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뼛속 깊이 주입하라'고 독자들에게 촉구했다. 〈필독서〉는 '수도원 생활은 경건하지 않다'고 단언했다는 점에서 평신도의 경건함을 밝힌 선언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뱅 근처의 파르크 수도원에서 그리스 〈신약성서〉에 관한 로렌초 발라의 〈주해집 Adnotationes〉 필사본을 발견했는데, 이 발견을 통하여 그는 '원시적 신학자'로서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을 더욱 면밀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1505년에 콜릿에게 바치는 헌사와 함께 이 책을 출판했다.

에라스무스는 연구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1505년에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그러나 원하던 지원은 받지 못하고, 나중에 헨리 8세의 주치의가 된 의사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이탈리아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북유럽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일행은 대학 도시 볼로냐에 도착하여, 때마침 군인 교황인 율리우스 2세가 정복군의 선두에 서서 볼로냐에 의기양양하게 입성(1506)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장면은 나중에 에라스무스가 익명으로 발표한 대화체 풍자문학인 〈Julius exclusus e coelis〉(1513~14)에 등장한다. 베네치아에서 에라스무스는 이름난 출판사인 '알두스마누티우스'의 환영을 받았다. 이 출판사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로 망명한 사람들이 수많은 학자들의 지적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격언들을 모아 주석을 붙인 알두스판 〈격언집〉을 3,000개 항목이 넘는 분량으로 증보하여, 지식의 금자탑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이 책이었다. '네덜란드의 귀'라는 격언은 그가 기교에 치우친 이탈리아를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암시 가운데 하나이다.

이탈리아의 설교는 지나치게 연극적이었고, 이탈리아 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했다. 에라스무스의 목표는 정직하고 겸손한 '네덜란드의 귀들'을 쓰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썼지만 1529년에 출판한 〈소년 교육론 De pueris instituendis〉은 교육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한 글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면 하찮은 욕망은 억제하고, 평화를 사랑하거나 사교적인 기질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에라스무스는 글 자체가 그 사람이라고 믿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고전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의 '인문학'은 인간 정신에 유익한 영향을 주는 반면, 형식에 치우친 이론의 나열은 논쟁적인 기질을 유발하고 '어리석고 폭군적인 아서 왕의 우화' 등과 같은 기사문학은 젊은 귀족들에게 복수심과 방탕함을 가르친다고 믿었다. 유명한 〈우신 예찬 Moriae encomium〉은 에라스무스가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구상하여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집필한 책인데, 이 책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진지한 학자 에라스무스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만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도 보편적인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 풍자에서는 어리석은 정열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현명한 사람조차도 자식을 낳고 싶으면 바보 짓을 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오랫동안(1509~14) 잉글랜드에 머물렀지만,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그리스어 〈신약성서〉 작업을 비롯한 학구적인 일에 종사했다는 것말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나중에 그가 자기 견해를 기꺼이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릿의 용기를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콜릿은 헨리 8세가 전쟁을 추구하고 있을 때, 왕의 노여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궁정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대륙으로 돌아오자, 요한 프로벤 출판사와 관계를 맺고 〈격언집〉 개정판(1515)을 준비하기 위해 스위스 바젤로 갔다. 이 책뿐만 아니라 같은 무렵에 쓴 다른 저서에서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죄악, 즉 호전적인 야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리스도보다는 카이사르를 흉내내는 교황들, 개인의 사소한 원한을 갚기 위해 나라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군주들, 군주들의 전쟁이 정당하다고 선언하거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미신적인 의식을 가르침으로써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설교사들을 비판하는 데 새로운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죄악을 없애기 위해 에라스무스는 교육에 기대를 걸었다. 특히 설교사들의 훈련은 형식에 치우친 학구적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주석을 붙인 주석본과 자신이 편집한 성 예로니모의 〈저작선집 Opera omnia〉으로 본보기를 보이려고 애썼다(성서 번역). 이 2권의 책은 1516년에 프로벤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무렵 에라스무스는 '다시 젊어지는 세계'를 보았다고 생각했고, 그의 낙관론은 〈신약성서〉에 붙인 서문의 하나에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복음서를 정확히 충실하게 설교하면, 그리스도교도는 많은 전쟁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제 브라반트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 브뤼셀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네덜란드 궁정이 있었고, 그는 총리인 장 소바주를 비롯하여 궁정에 유력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있었다. 그는 소바주를 통하여 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된 16세의 카를 대공을 보좌하는 명예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리스도교 군주 교육론 Institutio pirncipis Christiani〉(1516)·〈평화에 대한 호소 Querela pacis〉(1517)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저서들은 에라스무스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지만,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소바주의 파벌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를 의역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신약성서〉의 각 편은 군주나 교회 수장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루뱅 근처에서 신학 교수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갓 설립된 트릴링구알 칼리지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진정한 신학방법 Ratio verae theologiae〉(1518)은 언어 공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초판이 나오자마자 많은 주석을 비롯해서 여러 부분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는 원문 비평가로서는 분명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학문의 역사에 우뚝 솟아 있는 비범한 인물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가 죽은 지 150년이 지날 때까지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은 문헌학적 원칙을 그는 직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루뱅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보수적 신학자들(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알지 못했음)은 돌연히 나타난 이 아니꼬운 '문법학자'에게 성서 해석을 맡기기를 꺼려했고,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 재판(1519)에서 성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을 그 자신의 라틴어 번역으로 바꾸었을 때도 루뱅의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에라스무스와 프로테스탄트의 갈등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점화제가 되어 중대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종교개혁). 이런 사건들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를 싫어하는 성직자들은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루터를 숭배하는 일부 독일인들도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암시한 것을 대담하게 선언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1516)는 바울로의 해석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중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었고, 1518년에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주장과 루터의 주장이 혼동되지 않도록 루터의 저서를 더이상 출판하지 말라고 출판업자인 프로벤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글, 적어도 〈교회의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보다 먼저 나온 글을 읽으면서 감탄할 만한 점을 많이 발견했고,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루터를 '복음서의 진리를 알리는 힘찬 나팔'로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루터의 가장 큰 적은 언어 공부를 이단의 근원으로 보고 따라서 언어 공부와 이단을 한꺼번에 뿌리뽑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좋은 글'에는 파괴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대결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영향력의 가느다란 실에 의지했지만, 이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그가 1521년 12월에 브라반트 주를 떠나 바젤로 간 것은 루터를 비난하는 책을 써달라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직접 요청하면 그는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라는 에라스무스의 믿음은 근본적이었지만, 그가 가장 잘 아는 네덜란드인이나 브라반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적 박해의 잔인한 논리를 혐오했다. 그는 〈대화집〉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이 책은 원래 학생들의 대화체 작품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주석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믿음에 대한 질문'(1522)이라는 대화에서 가톨릭교도는 놀랍게도 루터 신봉자들이 믿음의 모든 교리, 즉 사도신경의 모든 항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교황의 무류성이나 루터의 예정설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교리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단순한 견해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교회 분열의 근원은 신학이 아니라 성직자의 개입에 반대하는 반교권주의였고, 성직자들이 지옥의 고통을 무기로 삼아 의무적으로 지키도록 규정해놓은 율법과 '종교의식'에 대한 평신도들의 분노였다.

그가 루뱅에서 알게 된 네덜란드 출신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23 재위)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듯이, 교회가 그 부담을 줄여주기만 하면 아직도 화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평신도에게 양형성체를 허용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하면 화해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유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 모든 것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드리아노 6세의 뒤를 이어 클레멘스 7세가 즉위하자 에라스무스는 더이상 신학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원형 경기장으로 내려가기'를 피할 도리가 없었지만,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울리히 츠빙글리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루터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1524)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원의 과정에서 맡는 역할을 옹호했고, 성서 해석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친 교회의 합의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 대답으로 루터는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저서 가운데 하나인 〈노예 의지론 De servo arbitrio〉(1525)을 썼다. 여기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2부로 이루어진 장황한 〈히페라스피스테스 Hyperaspistes〉(1526~27)로 응수했다.

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이 논쟁에서 에라스무스는 바울로나 성 아우구스티노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자유 의지를 요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젤에서 지낸 기간은(1522~29) 논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일부 논쟁은 루터와 벌인 대토론에 비하면 약간 지루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을 되풀이 비난하는 정통파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복음서에 대한 배신자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짜증이 난 나머지 옹졸한 성격을 자주 드러냈다.

그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쓴 글에는 학자들이 아직 이용하지 않은 자료도 들어 있지만, 대체로 그가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비평에서 더 뛰어난 솜씨를 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아는 젊은 '가짜 복음주의자'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복음서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을 묘사한 대화체 작품은 그 좋은 보기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이 책은 통틀어 5가지 판으로 간행되었음)와 〈의역〉, 그리고 치프리아노와 힐라리오 및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글을 편집한 저서를 계속 펴냈다.

그는 또한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미신적' 열정 때문에 라틴어 산문을 비고전적인 용어로 더럽히기를 거부한 인문주의자들(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이었음)을 호되게 나무라는 데도 시간을 바쳤다(〈키케로파 Ciceronianus〉, 1528).

말년

1529년에 프로테스탄트 도시인 바젤이 가톨릭 예배를 완전히 금지하자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인 몇몇 친구들은 가톨릭 도시이며 대학 도시인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로 이주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했는데, 이 의회에서는 필리프 멜란히톤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루터 신봉자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 최초의 의미 있는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에라스무스는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일치회복론 De sarcienda ecclesiae concordia〉(1533)을 통해 그같은 토론을 부추겼는데, 이 책은 의인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는 '이중의 정의'(이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음)를 고려함으로써 조정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설교 입문서 〈에클레시아스테스 Ecclesiastes〉(1535)가 출판되는 것을 보기 위해 바젤로 돌아온 그는 바젤이 자신의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도시에서 오래 머무르다가 1536년 7월 12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아리에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의 마지막 종부 성사를 요구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네덜란드어로 '사랑하는 하느님'이었다.

영향과 업적

죽을 때까지 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한 가지 문제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등장한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신앙을 위해서라면 어떤 싸움에도 뛰어들 각오를 함에 따라, 그의 우유부단과 의도적인 모호한 표현은 점점 더 가치를 잃게 되었다. 양쪽의 중재인들이 가톨릭교도와 루터 신봉자들 사이에 의미있는 토론을 벌일 기회를 가진 동안에는 에라스무스의 실제적인 제안과 온건한 신학적 견해가 그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다. 교회일치운동이 단지 한 가닥 가능성으로 희미해진 뒤에도 프랑스의 자크 오귀스트 드 투와 네덜란드의 휘고 그로티우스 등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에라스무스의 외로운 노력을 인정했고, 그를 계승한 후계자임을 기꺼이 자처했다.

두 사람이 국가의 권위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각자의 국교회에 속하는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싶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전통은 아마 네덜란드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종교적 반대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주장한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른헤르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에라스무스한테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칼뱅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런 견해는 대체로 제한된 영향력밖에 가질 수 없었다. 1571년에 나온 가톨릭의 〈금서목록 index expurgatorius〉에는 앞으로 출판되는 에라스무스의 저서에서 삭제해야 할 구절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고,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점을 갖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경향(당시 독일의 필리프주의자들과 네덜란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사이에 유행했음)은 좀더 엄격한 정통적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패배했다.

교실에서도 학생들을 고전문학과 직접 접촉시키기를 좋아한 에라스무스의 방법은 과거의 형식적인 교과과정과 비슷한 인문주의적 수사학과 논리학 개론 및 입문서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 원문에 접근할 때 발휘한 대담하고 독자적인 학구적 기질은 오랫동안 신학논쟁의 절박한 요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에라스무스의 평판은 17세기말에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유럽의 마지막 종교전쟁이 기억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리처드 사이먼과 장 르 클레르크(에라스무스의 저술을 편집한 사람) 같은 학자들이 다시 한번 성서 원문에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던 시기였다. 볼테르 시대인 18세기에는 영리하고 약간 회의주의적인 에라스무스가 너무 일찍 태어난 계몽철학자였던 것이 분명하고, 그가 종교적 헌신과 교회에 대한 복종을 공언한 것은 기회주의적인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는 정통파 비평가들의 혹평과 기묘하게 대응하면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라스무스의 목표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뿌리를 좀더 깊이 인식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화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충분히 인정한 것은 수십 년 전이었다. 그러나 볼테르처럼 모든 경우에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인간 사회를 단결시키는 다양한 공동이익에 대해 말하는 데는 별로 능숙하지 못한 계몽철학자들과 에라스무스를 비교하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부 역사가들은 서구 사상의 이런 상보적 측면들 사이에 벌어진 지속적인 논쟁을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사하고 있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에라스무스와 볼테르는 경계선의 같은 편에 서 있고,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와 루소는 그들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인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로서,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교도로서 자신의 다양한 자기 정체성을 융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유럽 문화의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