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

다른 표기 언어 Sir Thomas More
요약 테이블
출생 1477. 2. 7, 런던
사망 1535. 7. 6,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인문주의자·정치가·대법관(1529~32). Saint Thomas More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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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년기
  3. 유토피아
  4. 국왕의 충실한 종복
  5. 대법관시절
  6. 최후의 날들
  7. 평가
모어(Sir Thomas More)
모어(Sir Thomas More)

개요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참수형에 처해졌으나 1935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반열에 올랐다(휴머니즘).

초년기

토머스 모어는 법률가로서 기사작위를 수여받고 고등법원 왕좌부(王座部) 판사가 된 존 모어 경의 장자로 태어났다.

스레드니들가(街)의 명문 세인트앤소니 학교에서 공부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턴경의 가인이 되었는데, 대주교는 특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시동(侍童)은 언젠가 위대한 인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모턴의 관심은 소년을 옥스퍼드에 진학시켰고 어린 토머스 모어는 라틴어와 형식논리를 공부하며 2년을 보냈다.

1494년경 토머스 모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런던에서 코먼 로(보통법)를 공부했다. 1496년 2월에는 법률가 지망생들을 위한 링컨 법학원에 들어갔으며 1501년 일반 법정변호사가 됨으로써 정식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끊이지 않는 호기심과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의 사무처리 능력에 힘입어 토머스 모어는 법률연구 외에도 문학에의 열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독서광이었던 모어는 성서·교부철학·고전문학뿐 아니라 손에 잡히는 모든 장르를 섭렵해나갔다. 모어는 법률가로서 대성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신의 뜻에 순명하기 위하여 의절마저도 각오하고 있었다.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시험해보기 위해 약 4년 동안 링컨 법학원 부설 카르투지오 수도회에 머물렀고 가능한 한 온전히 수사들의 생활을 체험해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깊이 매료되기도 했으나 평신도로 남는 것이 신과 인간 모두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임을 깨달았다.

1504년말에서 1505년초 사이에 토머스 모어는 에식스 출신 지주의 영애(令愛)인 제인 콜트와 결혼했다.

아직 어린데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라틴어와 음악을 지도받았고 외국의 방문객들을 맞이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교양과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템스 강가의 올드 바지에 있던 토머스 모어의 저택은 결혼 후 20년 동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바로 이곳에서 〈우신예찬 Morioe encomium〉의 집필을 마쳤다.

토머스 모어는 조기조침과 기도생활, 거친 모직 셔츠에 절제된 식사 등 영·육의 청빈함을 잃지 않았다. 신이 그의 삶 한가운데 자리했던 것이다. 그무렵 모어는 생계유지와 인문주의적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사회생활에 보다 치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509년 런던의 상사와 안트웨르펜 상인 대표들 간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통상문제 전반에 관한 역량을 인정받았다.

1510년 9월부터 1518년 7월까지는 법률·무역 관계 업무를 청산하고 런던의 민선행정관 대리로 일했으며 공평무사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511년 여름 제인이 출산중에 죽음으로써 토머스 모어의 목가적인 가정생활은 잔혹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마거릿·엘리자베스·세실리·존의 네 자녀를 남겨둔 채 제인은 '토머스 모어의 어린 반려자'(uxorcula Thomae Mori)로서 묘비명에 새겨졌다. 이로부터 수주일이 되었을 때 모어는 런던 직물상의 미망인인 앨리스 미들턴과 재혼했다.

토머스 모어의 표현으로 "미인도 아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자도 아니지만 좋은 아내"였던 앨리스는 양녀와 피보호자들이 딸린 대가족의 여주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모어의 가정은 가정교사들이 다양한 주제를 교육하고 젊은이들은 묻고 배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지성의 산실이라 할 만했다.

과학 및 문학사상 토머스 모어가 남긴 업적들은 모두 공직에 취임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De civitate Dei〉에 대한 강의록은 통례와는 달리 철학적·역사적 방법으로 교부학의 유토피아 국가론을 해석한 것이며 1510년에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전기를 영역했다. 미란돌라는 여러 면에서 토머스 모어의 삶에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513~18년 모어는 〈리처드 3세전 History of King Richard Ⅲ〉을 집필해 역사기술상 신기원을 열었다.

〈리처드 3세전〉은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토머스 모어의 해석을 바탕으로 〈리처드 3세 Richard Ⅲ〉를 극화했다.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는 1515년 5월 영국-플랑드르 통상조약의 개정을 위한 협상대표로 임명되었다.

브뤼주에서 열린 통상회의가 휴회기간이 길어지자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주로 문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이 시기에 착수되어 런던에 돌아온 직후 완성을 본 이 책은 1516년 2월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아 루뱅에서 최초로 출간된 이후 인문주의자와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권두시에 처음 등장하는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와 'topos'를 조합하여 창출해낸 합성어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을 뜻했는데, '좋은 곳'이라는 뜻의 'eu-topos'의 동음이의어이기도 했다(유토피아 문학). 제1부는 안트웨르펜에서 신세계를 여행하고 막 돌아온 라파엘 히슬로데이를 소개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히슬로데이는 영국의 사회상황과 법률을 특히 절도죄와 연관지어 비평했다. 영국은 빈번하고 무익한 전쟁이 끝난 뒤 제대 군인들로 넘치고 있으며 새로운 지주들은 토지세를 인상하고 목장을 설치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잠식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했고 법은 그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 모든 현실이 도둑질을 야기시키고 죄과에 비해 가혹한 처벌이 수반되었다.

토머스 모어는 히슬로데이에게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히슬로데이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모어는 주민의 복지를 외면하고 영토확장과 통치에만 급급한 제후들이 재산의 공유를 주장하는 자신의 개선책에 귀를 기울일 턱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모어가 개선책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자 히슬로데이는 그것이 여행중에 찾아갔던 섬 '유토피아'에서 실제로 시행되고 있다고 대답한다.

제2부는 유토피아의 삶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유토피아는 사유재산과 돈이 없기 때문에 악이 번성하지 않으며 빈곤을 모르는 이상적인 국가이다. 농업이 주산업이며 누구나가 일한다. 행정관들은 선출되고 식사는 30세대가 함께 즐긴다. 여행은 행정장관의 허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쟁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만 자기방어를 위해서 수행되며, 실력행사보다는 계책에 의해 정복하는 것이 더 확실한 승리로 받아들여진다. 전쟁포로와 범죄자는 노예가 되며 종교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관용을 베푼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공산주의적 도시국가를 의미했다.

토머스 모어는 당시의 실제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참된 공동체적 인간관계를 예시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에 하나의 유익한 소책자를 헌정하고자 했다. 모어의 국가소설은 과거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반성임과 동시에 그 대안으로써 최선의 국가유형을 펼쳐 보이려는 대담한 시도였으며, 이론적인 면에서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저작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 모어는 착취와 계급적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려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선언이 지배 엘리트를 지향한 것인 반면에 유토피아의 근본 명제는 모든 사람들의 공산주의적 재산공동체를 그 핵심으로 한다.

토머스 모어의 출발점은 경제적 대립을 제거할 때 비로소 개별적 이해관계와 사회적 이해관계의 일치가 가능하리라는 것,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공동체적 관계가 이기적인 개개인의 이해를 배제하리라는 신념에 있었다. 유토피아는 "최선의 국가일 뿐 아니라 정당하게 공동체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비록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성직자와 정치지도자들 간의 결탁에 반기를 든 모어는 관용과 각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이상국가의 정신적인 토대로 선언했고 이는 곧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의미했다.

유토피아 주민들의 최고의 덕은 이웃의 불행을 덜어주는 선행이며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토머스 모어는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기보다 어떠한 지향점으로서 또한 현실사회를 바로잡는 시금석으로서 유토피아를 받아들였으며 악을 징계하기보다는 완화시키려는 정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유토피아〉에는 동떨어진 섬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그려져 있을 뿐 현실을 이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라든가 유토피아의 삶이 외부세계로 확산되어가는 적극성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히슬로데이를 향한 토머스 모어의 다음과 같은 충고에는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당신이 선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을 완전히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라. 모든 사람이 선해지지 않는 한 모든 일이 만족스럽게 되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각들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국왕의 충실한 종복

1517년 5월 1일 런던의 시민들이 체류 외국인들을 공격했다.

'5월의 재난'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토머스 모어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콤포지트식(式) 희곡인 〈토머스 모어 경 The Book of Sir Thomas More〉 속에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제기된 소송들이 칼레와 불로뉴의 어려운 협상들(1517. 9~12)을 통하여 성공적인 타결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공직을 달가워하지 않던 모어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어의 공직취임은 평화와 개혁을 위해 보다 유리한 기회가 되었고 이제 토머스 울지대법관도 인문주의적 정치이론에 얼마만큼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1515~20년 에라스무스가 성서와 교부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학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주요수단으로서 그리스 고전의 연구를 장려하자(예컨대 성서의 그리스어 및 라틴어 번역사업), 토머스 모어는 시와 공개서한을 통하여 열렬한 환영의사를 표시했다.

에라스무스는 울리히폰 후텐, 르맹 드 브리, 기욤 뷔데등 저명한 동료 인문주의자들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런던에 있는 연하의 친구를 유럽 지성의 본보기로서 소개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는 칼레 근교 '황금의 천' 들판에서의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회동을 동반했을 당시에(1520. 6) 이미 기욤 뷔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기술에 따르면 토머스 모어는 유난히 흰 피부에 짙푸른 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간소함이 식생활과 의생활을 관통하고 있었고 순수한 기쁨이 된다면 육체적인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음과 놀라운 기억력으로 즉흥적인 응수에 능란했으며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물로부터도 끊임없이 즐거움을 끌어낼줄 아는 사교의 명사였다. 토머스 모어의 가정에는 다사로움과 더불어 절제와 겸손이 머물고 있었다. 집주인은 늘 그리고 기꺼이 넘쳐 흐르도록 사랑을 베풀었다. 이국의 풍물들이 저택을 장식하고 먼 나라에서 온 진기한 동물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격심한 공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기도시간을 엄수했고 아이들을 살피는 일에 게으름이 없었다. 모어가의 소녀들은 최고의 고전적·그리스도교적 수양을 쌓았다.

토머스 모어는 1520~21년 칼레와 브뤼주에서 카를 5세및 한자동맹과의 협상에 참여한 뒤 재무차관으로 승진했고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모어가 종교개혁 논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바로 이무렵의 일이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거의 모어의 도움으로 루터의 〈바빌론 유수(幽囚)에 관하여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에 응수했고, 〈7성사(七聖事)의 옹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1521)를 내놓았다(루터). 루터가 격렬한 반론을 제기한 뒤 모어는 다시 〈반(反)루터론 Responsio ad Lutherum〉(1523)을 집필했다.

토머스 모어의 논조는 대단히 학구적인 것이었지만 품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토머스 모어는 재무부에서의 일과 외에도 외국사절단을 영접하고 조약을 기초하며 국왕과 대법관 사이의 공문서를 읽고 국왕 명의로 답변서를 발송하는 등 헨리의 충실한 조신(朝臣)으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했다. 1523년 4월 서민원(하원) 의장으로 선출된 모어는 정부의 이해를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회를 진정한 토론의 장(場)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1524)와 케임브리지대학교(1525)의 대학 재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524년이 되자 토머스 모어는 런던에서 첼시로 이주했다.

첼시에 축조된 대저택에는 토머스 모어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고 미술관·예배당·도서관 모두가 학구적이고 신앙심깊은 인문주의자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1525년 랭커스터 공령(公領)의 상서(尙書)에 오른 모어는 북부지방의 대부분을 관할하게 되었다. 1527년 여름 모어가 대사직을 마치고 프랑스에서 귀환하자 헨리 8세는 성서를 그의 앞에 펼쳐보이며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은 후사를 얻지 못한 까닭에 무효이며 더구나 캐서린은 죽은 형 아서와 결혼했던 여자이므로 근친상간의 추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주장했다.

토머스 모어는 국왕의 주장에 따라 일말의 타당성이라도 찾아내기 위하여 오랜 기간을 두고 숙고와 숙고를 거듭했지만 캐서린이 진정한 영국의 왕후임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이듬해 3월 턴스톨 런던 주교는 속어로 씌어진 항간의 모든 이단문서를 검토하여 몽매한 시민들의 신앙을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단에 관하여 Dyaloge Concerning Herecies〉는 1529~33년 씌어진 7개 반론의 첫부분에 해당한다.

대법관시절

1529년 턴스톨과 토머스 모어는 울지 추기경의 불성실로 인한 국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고 영국은 캉브레 조약을 받아들였다.

울지가 더이상 국새(國璽)를 남용할 수 없게 된 10월 19일로부터 6일이 지났을 때 토머스 모어는 불안감 속에서 대법관직에 올랐다. 모어는 국왕의 대변자로서 의회개원연설을 통하여 울지를 기소했고 캐서린과의 이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학계의 공식입장을 공포하기도 했지만(1531), 1530년 귀족과 성직자들이 바티칸에 이혼청구서를 제출하려 했을 때는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다.

1531년 "그리스도의 계율이 허락하는 한……"이라는 단서를 빌미로 헨리 8세가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되고 영국 교회가 '국교회'라는 명칭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신임 대법관은 사퇴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규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反)틴들론 The Cōfutacyon of Tyndals Answere〉(2권, 1532, 1533)을 집필하느라 몇 시간씩 원고에 매달렸던 토머스 모어에게 협심증 증세가 나타났다.

토머스 모어는 1532년 5월 16일 국사의 짐을 덜도록 해달라고 헨리에게 간청했는데, 이날은 바로 캔터베리 대주교 회의가 국왕의 동의 없이는 법률제정이나 회의소집을 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발송한, 즉 헨리 8세를 영국 교회 전체의 영적 지도자로 맞아들이게 되는 날이었다.

예전처럼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가정으로 돌아온 토머스 모어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안정을 취하며 모처럼의 한가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우선 자신과 아내가 묻힐 무덤을 마련했으며 〈변론 Apology〉·〈정복 Debellacyon〉등의 저술을 통하여 반이교법을 옹호하고 이단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토머스 모어는 탐욕스러운 작태라는 틴들의 비난에 웃음을 보냈고 고위성직자들이 생계보조금으로 희사한 5,000파운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목상의 자선일 뿐 자신의 입을 막아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계략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날들

1533년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을 왕비로 책봉했다.

앤 불린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은 토머스 모어는 자연히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곤경에 처하게 된 쪽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적대자들이었다. 1534년 2월 모어는 마침내 사권(私權) 박탈자 명부에 오르게 되었다. 날조된 모어의 죄상은 헨리의 이혼과 관련하여 해괴한 예언을 유포하고 다니던 성처녀 엘리자베스 바턴과 공범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바턴). 사실 모어는 국사에 간여하지 말라는 충고의 서한을 그녀에게 보냈었다.

4월 13일 왕실은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의 소생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계승률'을 강요했다. 앤 불린을 성별(聖別)된 왕비로 인정하고 계승률에 대한 서약을 이행하려고 생각했던 토머스 모어는 서약의 내용이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임을 알고 곧 마음을 바꾸었다.

1534년 4월 17일 토머스 모어는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기꺼이 감옥생활을 받아들였다. 서약을 하고 아버지를 면회온 마거릿에게 말했던 것처럼 가족들만 아니라면 그보다 더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 탑에서 집필된 〈시련과 위안 A dialoge of comfort against tribulacion〉은 그리스도교 지혜문학의 정수로 손꼽히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공판은 1575년 7월 1일 시행되었다.

실권자인 올리버 크롬웰의 심복이었던 리처드 리치 법무차관은 피고인이 자신 앞에서 국교회 수장 헨리 8세의 권위를 부인했다고 증언했다. 토머스 모어는 법무차관의 위증을 통렬하게 반박했지만 배심원들의 평결은 예외없이 유죄였다. "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라고 서두를 꺼낸 최후의 진술에서 모어는 자신이 감수하는 수난의 첫째 목표는 교회의 분열을 막아보려는 것이며, 속인이 영적인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진정한 이유는 떳떳하지 못한 앤 불린과의 결혼 때문인데, 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가톨릭 교회는 숱한 비난을 듣게 되었다고 피력했다. 재판관들 가운데에는 새 왕비의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삼촌이 끼어 있었다.

선고된 형벌은 반역자의 죽음(창자를 빼낸 뒤 교살하고 사지를 찢음)이었지만 헨리의 형벌변경 조치가 내려짐에 따라 참수형으로 결정되었다. 5일의 유예기간 동안 토머스 모어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묵상과 함께 몇 편의 아름다운 시와 작별의 편지들을 남겼다. 타워 힐의 단두대로 다가선 모어는 동행한 교도관에게 스스로 의식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과 눈가리개의 사용을 허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런던 탑의 언덕 위에는 여기저기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토머스 모어는 마지막으로 "저는 이제 가톨릭 교회의 믿음 속에서 가톨릭 교회의 믿음을 위하여 죽습니다. 국왕 폐하의 신실한 종복임을 자처하지만 그 이전에 순명하는 주님의 종인 까닭입니다" 라고 말했다. 모어의 죽음은 유럽을 경악시켰고 신교 국가들에서조차 의구심의 대상이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자랑스러웠던 연하의 친구를 애도했다.

"토머스 모어는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평가

1886년의 정부문서 공개로 토머스 모어의 행적들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남에 따라 시복(諡福)의 여론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후 400년 만인 1935년 5월 20일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하여 결실을 거두었다.

위대한 인격과 그 인격의 정점을 이루는 순교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모어의 명성은 주로 황금빛의 작은 책 〈유토피아〉에 한정되어 있다. 모어의 별칭인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는 원래 에라스무스가 붙인 'omnium horarum homo'에서 유래한 것으로 1960년 로버트 볼트가 발표한 동명의 희곡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널리 유포되었다.

영국의 가톨릭 옹호자 G. K. 체스터턴이 표현한 대로 토머스 모어 경은 영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축일은 6월 22일이며 최근 웨스트민스터 홀과 런던 탑에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