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울지

다른 표기 언어 Thomas Wolsey, Cardinal
요약 테이블
출생 1475경, 잉글랜드 서퍽 입스위치
사망 1530. 11. 29, 레스터셔 레스터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추기경·정치가.

1515~29년 헨리 8세(1509~47 재위)의 정부를 좌우했다.

그가 신망을 얻지 못했던 관계로 그의 몰락 직후 성직자에 반발하는 기운이 일었으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한 요인이 되었다.

서퍽 입스위치 출신의 푸줏간집 아들로 태어난 울지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498년 성직 서품을 받았으며, 5년 후 칼레 부총독인 리처드 낸펀 경의 사택목사가 되었는데 바로 낸펀 경이 그를 헨리 7세(1485~1509 재위)에게 추천했다.

1507년 낸펀 경이 죽자 울지는 헨리 7세의 궁정목사가 되었으며, 1509년 4월 헨리 7세의 사망 직전에는 링컨의 사제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력적인 면모와 자신만만함 때문에 곧 헨리 7세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인 헨리 8세의 총애를 얻었다. 1509년 11월 왕실의 구휼품분배담당관에 임명된 그는 쾌락을 좋아하는 젊은 왕 헨리 8세를 손쉽게 설득해 달갑지 않은 국정의 근심거리들을 상당부분 잊도록 했다. 두 사람 사이의 유대는, 특히 1513년 큰 성공을 거둔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을 울지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함으로써 더욱 긴밀해졌다.

헨리 8세는 그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천거해 링컨 주교(1514. 2), 이어서 요크 대주교(1514. 9), 추기경(1515)에 임명되도록 했다. 1515년 12월 대법관이 되었으며, 3년 후에는 교황에 의해 교황특사에 임명되었다. 울지는 막대한 세속·성직 권력을 이용해 잉글랜드 왕 다음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울지와 헨리 8세 두 사람 모두가 가장 우선시한 것은 잉글랜드를 유럽 정치무대에서 세력균형의 조정자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2개의 적대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잉글랜드와 오랜 적대관계에 있었던 프랑스를 축으로 한 것이며, 또 하나는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울지는 1518년 유럽 전역을 포괄하는 평화조약의 체결을 도모하고, 1520년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그리고 헨리 8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회동을 주선함으로써 프랑스와의 평화를 시도했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521년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2년 후 울지는 프랑스에 대항해 잉글랜드군을 참전시켰다(이탈리아 전쟁). 그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세금을 올렸으며 그결과 전국적으로 불만이 야기되었다.

1528년에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카를 5세와 맞서 전쟁을 벌였으나, 1529년 8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화약을 맺음에 따라 잉글랜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울지는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이라는 교황특사로서의 임무를 지니고 있었으나 계속되는 외교활동으로 교회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을 쏟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세속적이었으며 재물에 욕심이 많았고 행실 역시 올바르지 못했는데 사생아로 아들과 딸 1명씩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소한 몇 가지의 수도원 개혁안을 제시했으며 대략 29개의 수도원을 탄압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조치의 주요목적은 옥스퍼드대학교에 카디널스 칼리지(나중에 크라이스트 처치)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한편 그가 잉글랜드 사법제도에 미친 영향은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이었다(영국법). 대단한 법률적 심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성실법원(법원의 형태로 구성된 국왕자문회의 일종)의 사법관할권을 신장시켰으며, 법을 무시하는 귀족들을 처벌하는 데에 성실법원을 이용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송사를 포함한 각종 소송들을 심리하기 위해 그가 구성했던 협의회는 곧 청원법원으로 발전했다(1529).

울지가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설득해 승인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일부 귀족들은 오랫동안 비천한 출신의 거만한 추기경 울지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1529년 7월 교황으로부터 헨리 8세의 결혼무효 승인을 얻어내기 위한 울지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정적들은 손쉽게 헨리 8세와 울지와의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었다.

그해 10월 그는 교황특사로서의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로마 교황을 잉글랜드 국왕보다 우위에 두는 죄, 즉 교황존신죄(praemunire)를 범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요크 대주교직을 제외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 그는 1530년 4월 런던을 떠나 요크로 향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울지가 지위 회복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울지는 같은 해 11월 4일 프랑스 궁정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반역혐의로 체포되었으며, 헨리 8세와 대면하기 위해 남부로 향하던 도중인 11월말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