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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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87. 2. 8, 알자스 라이헨바이어
사망 1550. 11. 6, 뷔르템베르크 튀빙겐
국적 독일

요약 뷔르템베르크 공작(1498~1519, 1534~50).

독일 종교개혁 기간에 활동한 주요인물이다.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 5세의 손자로 태어나 1498년 에버하르트 2세를 계승하여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된 뒤 1503년 정식으로 취임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아누스 1세 및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하가(家)와 동맹을 맺어 팔츠의 영지를 얻었으나, 사치스런 궁정생활로 인해 큰 빚을 졌다. 1514년 새로운 조세를 부과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난한 콘라트'로 알려진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자 의회는 울리히에게 튀빙겐 조약을 맺도록 강요했고, 이 조약으로 의회가 그의 빚을 갚아줄 책임을 지는 대가로 그는 의회에 중요한 권리들을 양도했다.

그 뒤 울리히가 평화협정을 깨뜨리자 1519년 슈바벤 동맹은 그를 추방하고, 1520년 뷔르템베르크를 황제 카를 5세에게 팔았으며, 카를은 이 영토를 다시 자기 형제 페르디난트에게 주었다.

울리히는 한동안 스위스·프랑스·독일에서 지내면서 산적 행위를 일삼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밑에서 일했지만, 뷔르템베르크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 1523년경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개종한다고 공포했다. 슈바벤 동맹이 해체되자 프랑수아 1세의 도움을 얻어 1534년 뷔르템베르크로 돌아왔으며, 당시 투르크와 전쟁을 치르는 데 여념이 없던 페르디난트는 카덴 조약을 맺어 뷔르템베르크를 오스트리아의 봉토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울리히의 복권에 동의했다.

그 뒤 울리히는 교회 개혁을 위해 루터파 신학자들을 초빙한 뒤 수도원들을 해산하고 교회 토지를 몰수하고 대학교와 학교의 이념을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바꾸었다. 황제 카를 5세는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뷔르템베르크를 정복했지만, 1547년 무거운 전쟁부담금의 대가로 울리히에게 되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