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

츠빙글리

다른 표기 언어 Huldrych Zwingli
요약 테이블
출생 1484. 1. 1, 스위스 장크트갈렌 토겐부르크 빌트하우스
사망 1531. 10. 11, 카펠 근처
국적 스위스

요약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 가장 중요한 개혁가이다. 마르틴 루터와 같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보다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에 성서를 적용시켰다. 루터와는 성례전에서 의견 차를 보였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실제로 현림한다고 주장한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1504년 바젤대학교를 졸업했다. 1506년 사제가 되었으며, 1518년 그로스퀸스터에서 민중사제로 임명되었다. 그의 설교는 금식과 성직자 독신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자극했다. 1523년 도전적인 67개항을 공표했고, 이로써 전례에 대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카펠의 2번째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취리히 군대에 종군목사로 동행,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활동
  3. 개혁 개시
  4. 취리히 종교개혁의 승리
  5. 츠빙글리의 논제들
  6. 논쟁
  7. 루터와의 관계
  8. 공헌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개요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의 가장 중요한 개혁가로 교회 내에서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16세기의 유일한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와 같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보다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儀式)에 성서를 적용시켰다.

초기생애와 활동

츠빙글리는 마을 행정관이었던 자유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마르가레테 마일리는 투르가우에 있는 피싱겐 대수도원장의 누이였고, 츠빙글리의 아저씨인 바르톨로메우스 츠빙글리는 빌트하우스의 사제였으며 훗날 베센의 부제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베센에 있는 학교에 다녔으며, 그뒤 바젤(1494)과 베른(1496)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스승 하인리히 뵐플린은 그에게 고전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관심을 가져 수도원에 들어오도록 그를 부추겼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저씨로부터 설득당한 그는 빈(1498)과 바젤(1502)에서 공부했으며, 1504년 바젤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서적을 읽었고, 선생이자 개혁가인 토마스 비텐바흐의 강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06년 사제가 되어 글라루스로 간 그는 좋은 목자로 평판을 얻었고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교회교부들에 관해 폭넓게 독서했다.

또한 르네상스 운동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에라스무스와의 서신교환을 중시했다. 스위스 군대의 종군사제로 복무한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그가 취한 이러한 입장은 글라루스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1516년 그는 새로운 임무를 띠고 아인시델른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많은 순례자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와, 수도원에서 좋은 시설을 이용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동시에 얻었다. 츠빙글리는 훗날 자신이 성서를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인시델른으로 옮겨가게 된 시기부터였다고 기술했다.

글라루스에서의 어려움은 그에게 학문적인 의미 이상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개혁 개시

츠빙글리는 즉시 자신이 새로 얻은 확신들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통상적인 복음서의 귀절들을 해석하는 것에 만족하여 전통적인 입장을 공격하지 않았다. 1518년 대사(大赦)에 관한위기가 일어났는데, 츠빙글리의 그에 대한 재치 있는 혹평은 교회의 호의를 얻었고,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서훈을 받았고 종군사제로서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1518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에서 민중사제로 임명되었다.

그 직위로 인해 수입이나 공식적인 영향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많은 대중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약성서〉에 대한 일련의 해석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시대상황에 적용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었다. 1519년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하자 자신의 사역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고, 자신도 병에 걸려 회복되는 과정과 잇따른 형제의 죽음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본주의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한 그의 사고와 가르침은 영적이고도 신학적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1520년 그는 시당국으로부터 '진실하고 거룩한 성서'를 설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의 설교는 금식과 성직자 독신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자극했고 이로써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1522). 성서의 수위권이라는 견해에 따라 츠빙글리는 외에텐바흐 수도원에서 유명한 설교를 했고, 주교로부터 설교를 계속하라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했다.

소책자인 〈식사에 관하여 On Meats〉와 외에텐바흐의 강론들을 인쇄한 책인 〈하느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 The Clarity and Certainty of the Word of God〉이 1522년에 출판되었다.

취리히 종교개혁의 승리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523년은 취리히 종교개혁에서의 결정적인 해였다.

취리히의 마을회관(의사당·법정·공회당을 겸함)에서 1월 내내 진행되는 콘스탄츠의 총주교대리와의 논쟁을 준비하면서 츠빙글리는 자신의 도전적인 67개항을 공표했다. 그 주요내용을 그 지역 대부분의 주교들이 받아들임으로써, 전례에 대한 개혁이 시작되었고, 그로스뮌스터 개혁안이 상정되었다. 이 안의 요지는 성당부속학교를 문법학교와 개혁적인 사제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로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10월에는 교회의 성상들을 제거하는 문제가 2번째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츠빙글리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개혁가인 레오 유트가 승리를 거두었다.

1524, 1525년 잇따른 조치들이 취해져 성상들이 제거되고 오르 사용이 금지되고 종교건물들이 해체되었으며, 미사가 간단한 성찬식으로 대체되고 세례식이 개혁되었다. 또한 성서의 강독이 도입되고 목회사역이 재조직되었으며, 모국어판 성서본을 준비했다(〈취리히 성서 Zürcher Bible〉가 1529년에 출판됨). 츠빙글리는 설교를 하고 협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교육, 세례, 주의 만찬에 관하여 On Education, On Baptism, On the Lord's Supper〉와 특히 포괄적인 〈진실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설명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1525) 등의 저술활동을 통해 개혁운동을 강화시켜 나갔다.

1524년 4월 2일 그는 안나 라인하르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츠빙글리의 논제들

그 운동은 취리히 시로부터 취리히 주뿐만 아니라 인근의 주들로까지 퍼져나갔다.

학식 있는 가톨릭 신학자인 요한 에크의 조언을 받은 루체른·추크·슈비츠·우리·운터발덴의 5개주는 새로운 조류에 저항했지만, 바젤이나 베른 등의 중요 중심지에서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지지했다. 츠빙글리 자신은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동료 하인리히 불링거의 도움을 받아 공식적으로 베른에 종교개혁의 원칙을 도입한 베른 논쟁(1528)에 참여했다.

그가 제시한 주요논제들은 다음과 같다. ①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를 으뜸으로 삼는다. ② 교회의 법률은 성서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구속력을 갖는다. ③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의로움이다. ④ 성서는 주의 만찬과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현림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⑤ 미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⑥ 죽은 사람들의 중재나 개입, 연옥, 혹은 성상과 성화(聖畵)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없다. ⑦ 결혼은 모두에게 합법적인 것이다. 취리히는 우호적인 바젤·베른 주와 함께 그리스도교 시민 연맹을 맺었는데, 이 연맹은 바젤을 스위스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조약에 근거했으며, 또 공통의 신앙고백을 포함하고 있었다.

논쟁

1525년부터 츠빙글리의 활동은 스위스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의 루터파들과도 불화를 일으켜 난관에 부딪혔다.

취리히에서도 급진파가 생겨나 츠빙글리의 계획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들은 십일조의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진실한 신자들(〈신약성서〉의 가르침과 도덕적 신념에 따라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의 순수한 교회 설립, 유아세례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 1525년 1, 3월에 재세례파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최초의 재세례는 이미 2월에 행해졌으며, 폭넓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협의회 당국은 자신들이 우롱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지도자들을 감금했으며, 1525년 11월 무익한 논쟁을 좀더 계속한 후 결국 그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 반론으로 츠빙글리는 특별저서인 〈세례에 관하여 On Baptism〉(1525)를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서약의 표시로 물세례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다음 몇 해에 걸쳐서도 그는 그 주제에 관해 다른 많은 소책자들을 발행했는데, 〈재세례파들의 책략 Tricks of the Catabaptists〉(1527)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루터와의 관계

한편 미사에 관련된 츠빙글리의 사고와 의식은 마르틴 루터와 현저히 달랐다.

두 사람은 성찬식을 희생제사로 간주하지 않는 데 일치했고, 또한 성례전에서 실체의 변화라는 중세적 개념을 거부하는 데도 일치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구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 안에(혹은 함께) 실제로 현림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반면 츠빙글리는 '……이다'라는 단어의 참뜻은 '의미하다'이며, '실제로' 현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한 임재, 즉 성령의 힘에 의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이런 견해를 2권의 라틴어 소책자(1525)와 더 대중적인 작품 〈성찬에 관하여 On the Lord's Supper〉(1526)에 피력했다.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은 스위스의 운동을 진실된 복음적인 개혁 작업으로 보기를 거부하면서 신랄하게 대응했다. 헤센의 백작영주인 필리프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마르부르크 회담(1529)이 열렸으며, 화해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조정했다.

이 회담에는 루터,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 모두 참석했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일치를 보았지만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마르틴 부처가 내민 우정의 손을 거절했다(화체설).

츠빙글리는 신학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루터와 화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에 가담한 주(州)들이 고립될 위험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삼림 주들은 개혁파연맹에 대항해 자체적으로 있었으며, 황제가 개입할 실제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1529년 연맹은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서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16㎞ 떨어진 카펠의 삼림 주들을 공격했고, 이들을 제압했다. 슈트라스부르크 및 개혁에 가담한 시들과 손을 잡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런 시도들은 처음에는 헤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분열의 결과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1530)에서 논의되었고, 그 가운데 복음주의적인 그룹들은 츠빙글리의 〈이성적인 신앙의 이치 Fidei Ratio〉를 포함한 3개의 신앙고백을 제시했다. 츠빙글리는 동지가 없자 베네치아와 프랑스로 눈을 돌렸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통치자들을 설득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앙해설 Exposition of the Faith〉(1531)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냈는데, 그것은 그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빗나갔고, 1531년 츠빙글리는 연맹에 대해 삼림 주들을 공격하도록 촉구했다. 대신 베른은 무익한 경제제재 정책을 시도함으로써 삼림 주들이 1531년 10월 취리히를 공격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카펠의 2번째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취리히 군대에 종군목사로 동행했고, 그 전투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장소는 지금도 비석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카펠 전쟁).

공헌

후기에 츠빙글리가 교회정책에 몰두했다고 해서 신앙과 성직위계에 대한 그의 소중한 공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성서를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모든 교리와 의식에 엄격히 적용시켰다. 원죄에 대한 온건한 관점과 광범위한 구원에 대한 기대로 인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는 신의 주권을 특히 강조했다. 그가 성례전을 은총을 얻는 수단으로나,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개입하는 형태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불링거,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미글리, 장 칼뱅 등의 다른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심오한 사상의 근저가 되었다.

만약 츠빙글리가 교회정치에서 평신도의 권위를 협의회를 통해 행사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는 에라스투스주의(교회 문제에서 평신도의 권위를 중시하는 국가권력지상주의) 및 제네바에서처럼 소모적인 싸움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저술은 확실히 지리멸렬하고 주지주의적이지만, 그들 이면에는 개방적이고 따뜻하고 우호적인 경향이 숨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를 성서입각하여 대담하게 다시 생각하고자하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