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왕 필리프

관대왕 필리프

다른 표기 언어 필리프 , Philipp
요약 테이블
출생 1504. 11. 13, 헤센 마르부르크
사망 1567. 3. 31, 카셀
국적 헤센

요약 헤센의 제후.
(영). Philip. 별칭은 Philipp der Grossm대체이미지tige.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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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활동
  3. 프로테스탄트 개종
  4. 프로테스탄트 영방의 지도자
  5. 몰락

개요

독일의 가장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제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해 독일 제후들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헤센).

초기활동

란트그라프 빌헬름 2세의 아들로 아버지는 그가 5세 때 죽었다.

어머니인 메클렌부르크의 안나는 열정적이고 야심 있는 인물이었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이 두 사람 사이는 1519년 어머니가 재혼하고 필리프가 마르틴 루터의 교리로 돌아서자 더 멀어졌다. 그는 암울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일생을 통해 친구로 지낸 사람은 누나인 엘리자베트뿐이었다.

1518년 3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필리프가 성년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필리프는 아버지로부터 대부분이 숙련된 법률가로 구성된 자문단을 물려받았고, 이들은 젊은 필리프가 국가복지에 전념하도록 도왔다. 필리프는 이른바 계몽 전제군주의 정신으로 자신의 영토를 통치했다. 필리프는 헤센의 혼란된 행정체계를 바로잡고 능숙한 동맹정책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523년 그는 제국기사 프란츠 폰 지킹겐의 반란을 강력한 팔츠·트리어 선제후와 함께 진압했다.

이러한 승리는 헤센 귀족들의 반발을 완전히 잠재우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아울러 젊은 필리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2년 뒤 그는 이웃의 풀다와 헤르스펠트 대수도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튀링겐으로 진군하여 1525년 5월에는 여러 제후들과 손잡고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반란을 분쇄했다.

이 승리로 필리프는 독일 중부의 제후국들을 파괴의 위험에서 구했다.

프로테스탄트 개종

이러는 동안 종교개혁의 물결이 전독일을 휩쓸기 시작했고, 루터의 교리가 헤센의 여러 지방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필리프는 1524년 여름 성서와 교부들의 저작 및 교회사를 상세히 연구한 뒤 루터 편에 가담했다. 동시에 남부 독일의 정통 가톨릭 영주들은 이러한 교회 혁신의 물결에 맞서 단합했다. 필리프는 종교문제는 동시에 정치 문제이기도 하며, 프로테스탄트 군주와 도시들이 단결할 때만이 새로운 신앙의 자유가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라고 확신했다.

1526년 5월 그는 작센 선제후 요한과 손을 잡았고, 이후 북부와 중부의 여러 영주들을 이 동맹에 끌어들였다.

1526년 8월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발표한 칙령은 동맹에 법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 같았으며, 홈베르크에서 열린 헤센 '종교회의'는 필리프가 자신의 영지에서 실행에 옮겼던 종교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남부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을 선호했고, 그결과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를 중재할 것을 결심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27년 그는 모든 수도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교육제도를 직접 관장했으며, 마르부르크에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대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정책은 국민들의 종교 및 도덕 생활을 담당하고 그들의 신앙을 결정하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출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영방의 지도자

기민하고 두려움 없으며 상대방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소유한 필리프는 곧 여러 프로테스탄트 영방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대(大)연합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은 가톨릭 황제인 카를 5세가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면 분명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상황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529년에 열린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1526년의 칙령을 폐기하는 결정을 내리자 변화와 개혁의 방향이 정해졌다(마르부르크 회담). 필리프가 이끄는 제후들과 도시들은 제국 의회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해 제국 내 각 영방의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선언을 발표했다(여기서 신교도들은 `항의자, 즉 프로테스탄트로 불리게 되었음). 1531년 필리프는 6명의 제후와 10개의 도시를 프로테스탄트 진영 수호를 위한 슈말칼덴 동맹에 결속시켰다.

비록 조직상의 단점도 있었지만 이 동맹은 점차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유럽 정치에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필리프는 1534년 황제에 의해 축출당했었던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를 복위시켰는데 이때가 그의 절정기였다. 뷔르템베르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가담했고, 이로써 남부 독일의 오스트리아 세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몰락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는 극히 도발적인 일련의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그의 지도적 입지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필리프와 슈말칼덴 동맹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서로간의 다툼에 몰두해 있는 동안 카를 5세는 무력으로 종교문제를 완전히 해결해버리기로 하고 1546년 공격을 개시했다. 필리프가 우려해왔던 동맹의 엉성한 조직은 이제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지도력의 결여, 빈약한 재정이 동맹의 몰락을 재촉했다. 필리프의 사촌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사로잡히자 필리프는 1547년 자신에 대한 처분을 황제의 손에 맡겼다.

네덜란드에서의 장기간 수감생활은 그의 저항정신을 무력화시켰고, 황제는 제후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일 내에 가톨릭을 복구시켰다. 필리프는 자유를 얻기 위해 시도했지만 헤센 주민들이 가톨릭으로의 개종에 반발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결국 그의 장남 빌헬름과 사위인 작센의 모리츠가 독일 제후들과 함께 황제에 대항한 1552년에 와서야 그와 요한 프리드리히는 석방되었다.

필리프는 노쇠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를 통해 황제로부터 양보를 얻어냈다. 이 화의에 의해 이들은 가톨릭 세력과 법적인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필리프는 모든 그리스도 종파의 종교적 관용을 역설한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연합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정치무대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전쟁과 외국군대의 점령으로 황폐해진 자신의 영토를 재건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1567년 그가 죽을 무렵에 사람들은 그를 관대하고 마음이 따뜻한 군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