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가드너

스티븐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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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82경, 영국 서퍽 베리세인트에드먼즈
사망 1555. 11. 12,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주교·정치가.

영국 종교개혁시대 초기에 보수파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헨리 8세(1509~47 재위)의 반(反)교황정책을 지지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리에는 반대해서 결국 여왕 메리 1세(1553~58 재위)의 엄격한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였다.

의복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520~21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민법과 교회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무로 바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케임브리지대학과 계속 관계를 가져 1525~49년과, 1553~55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을 지냈다. 1525년 헨리 8세의 총리였던 월지 추기경의 비서가 되었고, 1528~29년에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을 파혼시키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협상하려고 로마에 갔다.

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영국교회의 지도자임을 선언했다. 이 일에 수고한 대가로 가드너는 1529년 헨리 8세의 수석비서관이 되었으며, 1531년 9월에는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주교관구인 윈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1532년 캔터베리 대주교를 임명할 때 왕은 그를 제쳐놓고 무명의 인물인 토머스 크랜머를 임명하였고, 크랜머는 나중에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가 되었다.

2년 뒤 헨리의 수석고문이던 토머스 크롬웰은 가드너를 수석 비서관직에서 서서히 물러나게 했다. 이 일로 가드너는 크롬웰 및 크랜머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가드너는 교황권을 공격하며 영국교회에 대한 왕의 우위권을 지지하는 논문인 〈참 복종에 대한 주교의 연설 Episcopi de vera obedientia aratio〉(1535)을 펴내어 왕의 신임을 다소 되찾았다.

1539년에 모든 영국인은 6개 조항에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복고운동을 이끌었다.

노퍽의 3대 공작으로 동료였던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1540년 6월 크롬웰을 몰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크롬웰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뒤 헨리 8세는 일부 자문위원들이 프로테스탄트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드너를 왕실회의에 항상 참석케 했으나, 이단혐의를 추궁하며 크랜머를 재판하자는 가드너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왕비 캐서린파를 쫓아내려는 운동도 실패하자, 헨리 8세는 아들 에드워드의 섭정위원에 가드너를 지명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급속히 뻗어나갈 때 가드너는 크랜머의 개혁운동 금지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1548년 1월에 풀려나긴 했으나 6월에 다시 런던 탑에 갇히고 1550년말에 주교직을 박탈당했으며,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나서야(1553. 6. 6) 풀려났다.

가톨릭교도인 메리 1세가 즉위하자 1553년 8월에 다시 윈체스터 주교로 복직되었으며,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실질적으로는 윈체스터의 수석 성직자가 되긴 했지만 곤란한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왕실이 점차 로마 교황청 쪽으로 기울어갔고, 메리 여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아들 필리프(스페인의 펠리페 2세[1556~98])와 결혼한 이후 영국 왕실은 스페인에 의해 움직여졌는데, 그가 이러한 왕실과 보조를 잘 맞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554년초부터 시작된 극렬한 프로테스탄트 박해를 지지했으며,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크랜머와 그밖의 몇 사람들을 박해로부터 구출하려고 한 것은 그의 공로에 속한다.

그는 박해가 끝나기 2년 전에 죽었다.

법률과 행정적인 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었고, 능력있는 성직자였으나 위대한 영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관련 서적으로는 J.A. 뮐러의 〈스티븐 가드너와 튜더 왕조의 반동 Stephen Gardiner and the Tudor Reaction〉(192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