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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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0(고종 27). 4. 26, 서울
사망 1957. 10. 10,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시인∙학자. 전통적인 시조 문학의 진흥과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 학병권유 등의 친일 행위를 하여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에 오점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경부 철도 노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가 있다.

목차

접기
  1. 생애
  2. 문학
  3. 역사학
최남선(崔南善)
최남선(崔南善)

전통적인 시조 문학의 진흥과 계몽성을 드러낸 창가·신체시·기행수필 등을 썼고, 단군조선을 비롯한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학병권유 등의 친일 행위를 하여 전반기에 보여주었던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에 오점을 남겼다. 본관은 철원(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교명은 베드루. 자는 공륙, 호는 육당(六堂)·육당학인(六堂學人)·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

그는 일제강점기에 보여주었던 친일행위를 제외하고는 시인·수필가로서의 문학적 업적과 계몽주의와 민족주의를 견지한 사상가·출판인으로의 공헌, 조선의 상고사를 재건하려는 역사학자로서의 노력 등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이와 같은 문학·역사학 방면의 활동은 언론인·사상가로서의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이광수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공적이다.

저서로 〈경부철도노래〉·〈한양가〉·〈세계일주가〉가 있고,〈백팔번뇌〉·〈시조유취〉·〈백두산근참기〉·〈심춘순례〉·〈금강예찬〉·〈반순성기〉 등의 문학적 관심을 표명한 것, 〈조선역사강화〉·〈아시조선〉·〈불함문화론〉·〈고사통〉·〈단군론〉·〈조선독립운동사〉 등의 역사와 민족문화에 관계된 것, 〈살만교차기〉·〈조선불교〉·〈조선의 신화〉·〈조선의 민담 동화〉 등의 종교와 민속에 관계된 것, 〈신정(新訂) 삼국유사〉·〈대동지명사전 大同地名辭典〉·〈신자전〉·〈신교본(新校本) 춘향전〉 등의 고전 정리와 주석에 관계된 것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육당최남선전집〉(15권)을 펴냈다.

생애

최남선
최남선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헌규(獻圭)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글과 한문을 깨쳤으며 1901년 3살 연상의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1902년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고,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고 귀국했다. 이듬해 〈황성신문〉에 투고한 글로 필화를 입어 1개월간 구금되었고,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 유학생 회지인 〈대한흥학회보〉 편집에 참여했다. 그러나 입학 3개월 만에 모의국회(模擬國會)사건에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 총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듬해 가을 인쇄기를 구입하여 귀국한 후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치하고 인쇄·출판업을 시작했다. 신문관에서 발행한 〈소년〉(1908)은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이며 후에 이 잡지가 창간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으로 순회강연을 다녔으며, 당시 민족주의자로서 무실역행의 준비론과 계몽주의를 추구했다. 1910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옛 문헌 보전에 힘썼고, 1911년 〈소년〉이 폐간되자 이어 〈붉은 저고리〉(1912)·〈아이들 보이〉(1913)·〈새별〉(1913)·〈청춘〉(1914) 등의 월간지를 발행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가 1921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22년 신문관을 해산한 뒤 동명사(東明社)를 설립하여 주간 시사잡지 〈동명〉을 펴내고 이 잡지에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이어 1924년 3월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다가 9월 사임하고,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으로 논설을 썼다. 1921년 박승빈과 함께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학술지 〈계명〉을 발간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면서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했으며 1944년에는 친일 업적이 인정되어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38년 만주의 어용신문인 〈만몽일보〉 고문을 거쳐, 이듬해 일본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42년 서울로 돌아와 우이동에 소원(素園)이라 이름 지은 집에서 사료수집과 조선역사사전 편찬작업에 몰두했으며, 이런 학문적 관심은 1943년에 펴낸 〈고사통 故事通〉에 잘 나타나 있다.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기 위해 이광수·김연수 등과 일본에까지 건너가 순회강연을 했는데, 8·15해방 후 이런 친일행위로 인해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다시 동명사를 설립하여 책을 펴냈으며, 6·25전쟁 때는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역임했다. 1957년 필생의 사업인 〈조선역사사전〉을 집필하다 뇌일혈로 죽었다. 1959년 우이동 소원에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전집이 발행되었다.

문학

그가 문학 방면에서 보여준 공적은 이광수와 더불어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1910년대 계몽주의 문학가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된다. 문학세계는 다음과 같이 대략 4가지로 나뉜다. 첫째, 〈소년〉·〈청춘〉을 통해 서양의 고전이나 시를 번역·번안하여 변혁기에 있던 한국 근대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했다.

특히 서양의 산문시 및 일본의 신체시와 창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식을 선보였는데, 〈소년〉에 발표한 〈구작3편 舊作三篇〉(1909. 4)·〈꼿두고〉(1909. 5) 등의 신체시와 〈가을 뜻〉(1908. 11)·〈소년대한〉(1908. 12) 등의 창가, 〈흑구자(黑軀子)의 노래〉(1908. 11)·〈맑은 물〉(1909. 6) 등의 가사 및 시조 외에도,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조선유람가〉 등의 장편 창가들를 창작·보급하는 데 힘썼다. 자신의 계몽주의 문학관을 드러낸 다양한 시가문학들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둘째, 외국문학의 수용과 이를 통한 근대 시문학의 활로를 모색하는 한편,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속〉 등의 논문을 발표해 시조의 본질을 밝혔고, 고시조를 정리한 〈시조유취〉(1928)를 펴내 시조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힘썼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하여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시조집인 〈백팔번뇌〉(1926)를 펴냈다. 그의 시조 문학의 이론화 작업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된 계급주의 문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문학을 기초로 삼았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이병기·이은상 등과 함께 현대 시조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셋째, 수필을 통해 역사 연구로 확립한 '조선정신' 또는 '조선주의'라는 민족주의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최남선
최남선

1925년 전국문화기행을 떠나 기행문인 〈심춘순례〉를 연재했고, 유물탐사반으로 백두산에 오른 감회를 쓴 〈백두산근참기〉는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백두산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1928년 금강산을 유람한 후에 〈금강예찬〉을 발표했고, 그밖에 〈반순성기 半巡城記〉 등의 기행수필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조선정신을 드러낸 모습이라 설명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수필문학 분야에서도 남다른 공적을 남겼다. 넷째, 한문투나 문어체를 우리말투로 바꾸는 문체변혁을 시도했다. 즉 〈소년〉 등의 잡지를 통해 새로운 문장을 소개하고 구어체 중심의 근대적인 신문장 운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청춘〉에서는 근대 문학의 새로운 주체들을 찾기 위해 현상문예응모란을 마련하여 신진문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역사학

최남선
최남선

그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한국역사를 탐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일관되게 민족문화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했고, 전생애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초기의 계몽주의와 준비론으로 무장한 민족운동가에서 조선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공적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논문 〈불함문화론〉을 통해 우리 문화의 사상적 기반을 '이미지'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수필 〈백두산근참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런 관점은 우리 문화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 〈단군론〉·〈아시조선〉 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시작을 건국신화에서 찾고 정사(正史) 중심의 사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로써 민족상고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으며, 한 민족의 근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조선상고사를 보완하기 위해 옛 문헌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조선과 만주 일대의 답사를 통해 고대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그밖에 〈조선역사강화〉·〈고사통〉 등의 한국사 개설서나 〈살만교차기〉·〈조선불교〉 등의 종교·민속 연구서에는 조선주의에 입각한 역사연구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그가 발견한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둘째, 그는 옛 문헌이나 고전문학 작품을 출판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문화사업을 실천했다. 일찍이 신문관이라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입증했고, 민족문화의 위대함을 상기시키려 한 이런 노력은 1910년에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조선광문회에서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1911)·〈열하일기 熱河日記〉(1912)·〈삼국사기 三國史記〉(1914) 등의 옛 문헌과, 〈춘향전〉·〈사씨남정기〉·〈심청전〉·〈조웅전〉 등의 고전문학 작품을 새롭게 정리하여 펴냈다. 출판을 통한 역사연구와 보급은 8·15해방 후에도 이어져 동명사를 통해 〈조선독립운동사〉·〈조선상식문답 朝鮮常識問答〉·〈국민조선역사〉 등을 펴냈다.

그의 옛 문헌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의 소생과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문화를 수립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