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향가

다른 표기 언어 鄕歌 동의어 사뇌가

요약 향찰로 표기된 정형시. 진성여왕 때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으나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 14수, 〈균여전〉 11수 총 25수가 전해진다. 350여 년 간 창작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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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가
  2. 형식

〈도솔가 兜率歌〉나 〈사뇌가 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한다.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향가도 많았다. 일반인들이 유희와 오락으로 삼는 도구였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대중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삼대목 三代目〉이 편찬되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 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문헌상의 창작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이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이다.

350여 년 간 당대인의 애호 속에 창작되었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보현십원가〉 이후로 고려조에는 향가가 더이상 창작되지 않았으며 예종이 1120년에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순수한 우리글이 없었던 때에 우리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쓰는 향찰로 표기되어 전한다. 〈서동요〉의 첫 구절 '善花公主主隱'은 '선화공주님은'으로 해독한다. '님 주(主)'는 뜻을 빌린 것이고 '숨을 은(隱)'은 음을 빌린 것이다.

향가의 해독은 관련자료가 부족하여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만 양주동의 해독이 있은 후 문학적 연구 분야에서는 대체로 그의 해독본을 정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학자의 해독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는 모두 설화 속에 삽입되어 전한다. 그 설화를 '배경설화'라고 하는데, 각 작품의 어학적 해독 및 문학적 해석은 배경설화의 문맥 안에서 이해될 때 완성된다.

시의 진술내용 자체는 순수하게 서정적이지만 설화 문맥 내에서 작품을 해석해볼 때 불교적·주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작가

작자층은 왕, 장안 사녀, 노인, 부녀자, 화랑,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화랑은 신체단련뿐만 아니라 예능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종교적 지도자로 승려들이 있었다. 따라서 화랑과 승려는 향가의 주 작가층이었다.

작가가 화랑이자 승려인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혜성가〉를 지은 융천사는 화랑의 지도자였던 승려이다. 〈도솔가〉·〈제망매가 祭亡妹歌〉를 지은 월명사는 피리를 잘 분 예능인이며 국선에 속하는 승려이다.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를 지은 충담사도 화랑인 기파랑을 찬양하여, 화랑도와 무관하지 않은 승려로 보인다. 승려 중에서 균여대사만 당대에 이름난 고승이고 나머지는 〈삼국유사〉 이외의 문헌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작명법에서 특징적인 점은 대부분 그 배경설화와 연관되어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변괴를 없앴다 하여 융천사, 피리를 잘 불어 지나가던 달도 멈추었다 하여 월명사, 임금께 치국안민의 도를 말했다 하여 충담사, 눈을 뜨게 해달라는 기도의 노래를 지었다 하여 희명, 도적들도 익히 그 명성을 알고 있을 정도로 향가를 잘 지었다 하여 영재, 임금과 자신 간의 신의 및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을 노래했다 하여 신충 등과 같이 이름에 설화의 내용이 수용되어 있다. 따라서 향가 작가의 상당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설화상의 가공인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름이 별로 알려진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화와 어울려 구전되는 과정에서 본명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형식

향가는 음악을 수반해 가창되었다.

4명의 화랑이 3수의 향가를 지어 그것을 대거(大炬)라는 승려에게 보내어 노래를 만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각 향가가 기록된 분절양상이 작품마다 다양한 것은 음악에서의 분절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향가의 형식은 그 의미분절을 기준으로 하여 4구체·8구체·10구체로 나누어진다. 4구체는 〈서동요〉·〈풍요 風 謠〉·〈헌화가 獻花歌〉·〈도솔가〉 등 4수, 8구체는 〈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처용가 處容歌〉 등 2수, 10구체는 〈혜성가〉·〈원왕생가 願往生歌〉·〈원가 怨歌〉·〈찬기파랑가〉·〈안민가 安民歌〉·〈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제망매가〉·〈우적가 愚賊歌〉·〈보현십원가〉 등 11수를 포함한 19수이다.

4구체는 기층민의 노래형식인 민요 형태이다.

이러한 민요 형태의 노래가 점차 장형화 추세를 보여 진화론적으로 8구체·10구체로 발전해갔을 것이라고 형식의 발생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8구체를 오히려 10구체 형식의 축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0구체인 사뇌가가 정제된 형식으로 완성되기까지는 기층민의 노래 형식인 민요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뇌가는 당시의 수도였던 사뇌야(詞腦野) 지방에서 유행하여 국가적인 가악으로 편입된 사뇌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뇌악의 존재는 통일신라시대 이전 내해왕대(196~230)부터 확인된다. 당시의 민요가 사뇌악으로 정립된 것이고, 사뇌악과 사뇌가가 가악과 가사의 관계라고 할 때 사뇌가의 형식은 민요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10구체인 사뇌가는 세련된 형태로서 향가 작가들의 애호 속에 대표적인 향가 형식이 되었다. 10구는 전3장으로 구분되며 제1·2장은 각각 4행으로, 제3장은 2행으로 구성된다. 제1장의 첫구는 대체로 짧게 시작한다. 그리고 제3장의 처음에 반드시 '아야·아으'(阿耶·阿也)와 같은 감탄사가 붙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시조의 종장 첫구가 영탄구로 시작되는 형식상의 특징과 유사하여 우리 고전시가의 형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균여전〉의 서문을 쓴 최행귀(崔行歸)는 사뇌가의 형식을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고 규정했다. 향찰로 표기된 시가를 총칭하는 향가의 장르적 성격은 매우 복합적이며 민요·순수서정시·교술시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향가에 대한 문학적 해석은 민요로서의 성격, 불교문학적 성격, 주술적 기능에 초점을 둔 무속적 성격, 순수 서정시적 성격의 측면에서 행해졌다. 각 향가는 이들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다.

〈서동요〉·〈풍요〉는 민요이다.

〈서동요〉의 작자 서동은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다. 서동은 신라 서울에 몰래 들어가 아이들을 꾀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장차 일어나기 바라는 선화공주와의 결합을 노래를 통해 먼저 기술함으로써 목적을 성취한 사랑의 주가(呪歌)이다. 〈풍요〉(선덕여왕대, 632~647)는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장안의 사녀들이 진흙을 운반하며 부른 노동요이다.

내용은 '공덕을 닦으러 오라'는 것으로 불교적이다. 〈도솔가〉(경덕왕 9)는 월명사가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며 부른 의식요이다. 해가 둘이 나타나는 변괴가 발생하자 경덕왕은 연승(緣僧)인 월명사를 청해 산화공덕을 하게 했다. 그러자 변괴는 즉시 사라졌다. 꽃에게 미륵(彌勒)을 모시라는 내용으로 불교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 꽃에 대한 명령적 언술이 그 효험을 발휘하여 변괴가 사라졌으므로 주가의 성격도 지닌다. 두 해의 출현을 역사적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세력의 등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헌화가〉(성덕왕대, 702~737)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위해 한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서정성 짙은 헌화의 노래이다. 수로부인을 무속적(巫俗的) 인물로, 소를 끌고 가던 노옹(老翁)을 마음의 소(心牛)를 추구하는 불교적 구도자로 해석할 때 이 작품은 원시종교적 성격과 불교문학적 성격을 각각 지닌다.

주가로서의 면모는 〈서동요〉·〈도솔가〉 외에 〈처용가〉·〈원가〉·〈혜성가〉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처용가〉(헌강왕 5)는 처용이 아내와 역신(疫神)이 동침하는 현장을 보고서 춤을 추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이에 감동하여 뉘우친 역신은 이후 처용의 화상만 보아도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신 퇴치기능을 지닌 문신(門神)의 유래를 담은 설화에서 이 노래는 주가로서 기능한다. "이미 빼앗긴 걸 어찌하겠는가"라는 마지막 구의 체념적 진술은 극기인(克己人)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다.

〈원가〉(효성왕 1)는 현사(賢士) 신충이 임금과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자 그 슬픔과 안타까움을 읊은 것으로서, 가사 내용만을 두고 볼 때 연군(戀君)의 서정적인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잣나무에 걸어두자 나무가 누렇게 시들어 이를 안 왕이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잣나무를 매개로 하여 주술적 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혜성가〉(진평왕대:578~631)는 흉조인 혜성이 출현하자 그것을 없애기 위해 융천사가 지어 부른 노래이다.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楓岳)으로 유람가려는 차에 갑자기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心大星)을 범했다. 융천사가 이 노래를 지어부르니 혜성이 없어지고 일본병사들도 제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흉조인 혜성을 길조인 '길을 쓸어주는 별'로 단언하는 내용의 주가이다.

통일신라시대는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신봉하여 불교문화가 찬란히 꽃핀 시기이다.

현전 향가 작가의 상당수가 승려이기 때문에 향가는 특징적으로 불교문학적 성격을 지닌다. 〈원왕생가〉(문무왕대, 661~681)는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간절히 희구하는 기도의 노래이다. 불교적 신심(信心)에 바탕한 불교문학이지만 관념적이지 않고 달의 아름다움과 소원의 절실함이 잘 어우러져 서정성이 짙다. 〈도천수대비가〉(경덕왕대, 742~765)는 천수관음(千手觀音)에게 눈을 뜨게 하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기원가이다.

희명이 5세 때 눈먼 아들을 시켜 분황사 천수대비 화상 앞에 나가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러자 아들은 광명을 되찾았다고 한다. 〈우적가〉(원성왕대, 785~798)는 승려인 영재가 남악(南岳)으로 은거해 들어가던 중 도둑들을 만나 불렀다는 노래이다. 칼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둑들의 구원이라는 보다 큰 선업을 말함으로써 도둑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보현십원가〉(추정연대:923~973)는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포교를 위해 지은 노래이다. 11수 중 10수는 〈화엄경〉의 예경제불(禮敬諸佛) 이하 보개회향(普皆廻向)까지의 보현십원을 각각 1편씩 읊은 것으로, 제목도 〈화엄경〉에서 그대로 따왔다.

마지막 11수는 〈총결무진가 總結无盡歌〉로 그동안 10가지로 나누어 노래했던 바를 총괄했다. 이 향가 11수는 최행귀의 한역시와 같이 전한다.

순수서정시적 성격을 지니는 작품으로 〈모죽지랑가〉·〈제망매가〉·〈찬기파랑가〉 등이 있다. 〈모죽지랑가〉(효소왕대, 692~702)는 득오곡(得烏谷)이 스승인 죽지랑을 찬양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읊은 노래이다.

'지난 봄, 시름, 얼굴, 그리움, 구렁' 등의 시어를 통해 인간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스승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순수서정시이다. 〈제망매가〉(경덕왕대, 742~765)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지은 노래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길·낙엽·나뭇가지' 등과 같은 자연물로 은유하여 서정적이다. 마지막에는 죽은 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나기를 도 닦으며 기다리겠다고 하여 불교적 세계관이 나타난다. 〈찬기파랑가〉(경덕왕대, 742~765)는 충담사가 화랑인 기파랑을 찬양하여 부른 찬가(讚歌)이다.

기파랑을 '달·잣나무'로 은유하여 높은 인격, 고매한 정신, 선비적 풍모를 찬양했다. 충담사의 또다른 작품으로 〈안민가〉가 있다. 이는 치국안민의 도를 읊은 것으로 군·신·민이 제 직분을 다할 때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한 교훈적 내용의 노래이다. 향가는 '말이 맑고 깨끗하며 그 뜻이 매우 높다'라는 당대인의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그 내용과 수사가 숭고하고 우아하며 평화롭다. 우리 고전문학의 훌륭한 자산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