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징거

마이스터징거

다른 표기 언어 meistersinger

요약 14~16세기에 주로 독일의 장인 및 상인 계급의 음악가·시인들로 구성된 조합의 일원.

스스로를 중세예술과 음악이론에 숙달한 시인들인 '12명의 대가'의 후계자들이라고 주장했다.

프라우엔로프라고 불리는 음유시인 하인리히 폰 마이센이 창시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마이스터징거는 궁정가인들을 계승하는 부르주아 문학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들의 진정한 선임자들은 교회 등에서 노래하기 위해 훈련된 평신도회에 속했던 것 같다. 뒷날 음악과 시가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하나의 기술로서 자리잡자 이 평신도회는 동업자 길드처럼 조직화된 '징슐렌'(Singschulen:노래학교)이 되었다.

이 학교의 주요활동은 노래경연대회를 여는 것으로, 이는 아직도 교회에서 계속되는 행사이다. 작곡은 옛 대가들의 선율에 맞추어 새 가사를 붙이는 데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노래의 주제·리듬·가사·연주 등은 타블라투르(Tablatur)라는 매우 엄격한 규칙으로 통제되었다. 이처럼 비창조적인 제한들에 대해, 보름스 출신으로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한스 폴츠(1515경 죽음)는 뉘른베르크 징슐렌에 광범위한 주제와 새로운 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이러한 개혁은 곳곳에서 일어나 징슐렌들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그리하여 학생(Schüler)·동문(Schulfreund)·가수(Singer)·시인(Dichter) 등의 과정을 거친 후에 심판관(Merkern)의 인정을 받아 각자의 곡을 갖게 됨으로써 '대가'(Meister)가 되었다. 한스 작스가 활약한 것은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였다.

한편에서는 이 16세기를 번성의 시대라기보다 쇠퇴의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쓰인 악곡·형식·주제는 그후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계속 전해져왔다. 그레고리오 성가·민요 등에서 비롯된 음악이 운율을 결정했는데, 톤(Ton)이란 운율과 곡조를 동시에 뜻하는 말이었다. 각 연(Gesätz)은 음악적으로 동일한 2개의 단(段 Stollen)인 전절(前節 Aufgesang)과 별도의 운율 체계를 갖춘 후절(後節 Abgesang)로 되어 있는데, 이 후절은 중세 궁정가인의 연가(戀歌 Minnesang)에서 유래되었으며 때때로 '바어(Bar) 형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는 강세나 음의 길이에는 관계없이 음절수를 맞추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며 압운 체제는 대부분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 3연이나 3배수의 연이 하나의 노래 또는 바어(음악적 바르 형식에서는 한 연에 음악이 따름)를 이룬다. 주제가 광범위한 경우에는 여러 개의 음조가 쓰였으나 노래는 무반주 독창곡이었다. 교회의 징슐렌에서는 폭넓은 종교적 주제가 운문화되었으나 종교개혁 후에는 루터가 개편한 성서만을 엄격히 고집했다. 15세기부터는 세속적인 주제도 썼다. 뒷날 선술집에서 열린 가요경연대회(Zechsingen)는 아마도 정식 징슐렌에는 끼지 못한 것으로, 여기에서 쓰는 주제는 익살스럽고 때로 음탕한 것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초기 중심지였던 마인츠·보름스·슈트라우스베르크에서 시작하여 독일 남부 전역과 슐레지엔·보헤미아까지 퍼졌다.

북부 독일에는 개별적 마이스터징거는 있었으나 징슐렌은 없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최고의 중심지는 뉘른베르크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마이스터징거 Die Meistersinger〉(1868)에서 보듯이 마이스터징거는 인기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문직업인·인문주의자·일반대중들에게 거의 무시당했으며 그들의 노래는 출판되지 못했다. 그들은 뛰어난 곡이나 예술가를 탄생시키지는 못했지만, 중세의 불안정한 시기에 예술에 헌신하여 종교적·도덕적 원리를 가르치려고 계속하여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1600년 이후에 현대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징슐렌은 점점 쇠퇴하여 사라져갔으며 메밍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학교도 1875년에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