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찰

향찰

다른 표기 언어 鄕札

요약 한자의 음과 석(釋)을 빌려 국어 문장 전체를 적은, 신라시대에 발달한 국어 표기법.

가요, 특히 향가의 표기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향가식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문장 전체를 적었다는 점에서 고유명사 표기법과 한문 문장의 끝에 토로 쓰이던 이두와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향찰이 명사·동사·어미를 비롯한 국어 문장 전체를 표기했다고는 해도 차자 방법은 의미부가 새김을, 형태부가 음을 빌려오기 때문에 고유명사 표기법이나 이두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향찰이라는 명칭은 〈균여전 均如傳〉(1075)에 실린 최행귀의 역시 서문에 처음 나타난다. 이 서문은 균여대사(均如大師)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최행귀가 균여대사가 지은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를 한시로 번역하면서 쓴 것으로, 여기에서의 향찰이라는 말은 신라어로 적은 문장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당악에 대한 향악, 당언에 대한 향언, 당인에 대한 향인의 경우와 같이 우리 고유의 것을 '향'(鄕)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당문에 대해 상대적인 뜻으로 향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향찰이 사용된 현존 향가 중 가장 오랜 것은 〈혜성가 慧星歌〉로 진평왕대의 것이다. 6~7세기 전후에 발달한 향찰은 경덕왕대에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제망매가 祭亡妹歌〉·〈도천수관음가 禱千手觀音歌〉·〈안민가 安民歌〉·〈도솔가 兜率歌〉 등이 지어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 11수로 겨우 명맥이 이어졌으나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여, 고려 예종의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향찰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관명이나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나 단편적인 단어의 표기에서 시작한 향찰은 이두와 구결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이미 임신서기석과 같은 초기 이두문이 나타나고 뒤어어 한자에 토를 다는 방법인 구결이 발달하여 이 2가지 표기법이 결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사나 어미와 같은 문법관계를 나타내는 부분은 한자의 음을, 개념을 나타내는 부분은 한자의 뜻을 빌려 표기하고 한문 어순이 아닌 우리말 어순을 갖는다. 고유명사의 경우 음만을 빌려 표기한 것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