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시조

사설시조

다른 표기 언어 辭說時調 동의어 장시조, 長時調, 장형시조, 長形時調

요약 장시조', '장형시조'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만횡청이라 하여 창법의 명칭으로 쓰이다가 문학양식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정철의 〈장진주사〉에서 시작되어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장시조', '장형시조'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만횡청이라 하여 창법의 명칭으로 쓰이다가 문학양식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정철의 〈장진주사 將進酒辭〉에서 처음 시작되어 조선 중기까지 드문드문 나타나다가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17세기말부터 19세기말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종장은 비교적 평시조의 율격과 비슷하나 초·중장은 평시조의 율격에서 크게 벗어나 길어진 형태이다. 작품에 따라서 중장이 가사처럼 길어진 것도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중장이 2음보 정도 길어지는 경우를 엇시조라 하여 중형시조와 장형시조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평시조와의 대비를 중요하게 여기고, 최근에는 모두 '사설시조'로 통용하고 있다.

발생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회변동과 음악의 발달에 힘입어 평시조가 변형·파격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경우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민간가요가 시조창에 얹혀 불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용은 평시조가 사대부의 사상을 담았던 것과 달리, 익살·풍자와 분방한 체험을 표현한 평민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장 작품성이 뛰어나며 당대 민중적 삶과 진솔한 정감을 역동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바람도 쉬여 넘는 고개……〉·〈서방님 병들여 놓고……〉·〈귓도리 져 귓도리……〉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② 성적 충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당대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작품들이 있다. 〈반여든에 첫 계집을 하니……〉·〈간밤의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이져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설시조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즉 중세적 도덕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 반면, 때때로 삶의 가치를 성적 쾌락만으로 보는 퇴폐적·허무적 사고를 유포한 부정적인 점도 있다. 그릇된 가치규범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으로서 의의가 있으나 그것이 곧 근대적 삶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이밖에도 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이나 현세적 삶에 대한 긍정, 사대부적 삶에 대한 동경 등 다양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 때문에 지은이도 여러 부류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① 사설시조의 탈중세적 속성에 주목해 지은이를 사대부와 대립하는 서민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② 사설시조가 평시조와 병행해 발전한 평시조의 부속 장르라고 하여 지은이를 평시조와 마찬가지로 사대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 2가지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고 다양한 계층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지은이를 조선 후기의 여러 계층 가운데 새로이 등장한 중간 계층으로 본다.

여기에는 경아전과 같은 중인들을 중심으로 해 당시 새로이 부상된 여항의 부호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중세기 해체를 배경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당시 여항의 유흥과 예술을 장악하여 주도한 집단으로서, 이들이 사설시조의 전승·향유·창작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여러 측면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는 사설시조의 전승과 창작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천택·김수장이 바로 경아전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