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장

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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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궁중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인 제향이나 연향이 열릴 때 쓰였던 노래 가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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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개념
  3. 형식과 내용
    1. 개요
    2. 국문악장
    3. 한문악장
    4. 현토악장
  4. 작자와 장르적 특성

개요

본래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에서 불려진 노래 가사를 포괄하나, 한국문학에서는 조선 왕조 초기의 특정한 시가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볼 때 악장은 노래로 부른 시이므로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개념

악장은 고려속요·경기체가·시경·초사체 등의 양식이 두루 나타나는 작품의 다양성으로 인해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악장은 조선 초기 건국창업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통치질서를 확립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왕업을 기리는 송도·송축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지닌다는 점에서 범주화가 가능하다. 고려 조정에서도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역대 제왕을 칭송하는 악장을 갖추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가 창건되면서 예악의 정비를 통해 통치이념을 확립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건국초의 분위기는 악장을 제정하는 데 특히 기여했다.

형식과 내용

개요

악장은 음악적 성격에 따라 아악·당악·향악 등으로 나뉘며 제향·연향 등 행사의 성격에 따라서도 그 형태가 다양하다.

언어 표기의 형식에 따르면 국문악장과 한문악장, 그리고 한시에 현토(懸吐)를 한 현토악장으로 대별된다.

국문악장

정도전의 〈신도가 新都歌〉, 정극인의 〈불우헌가 不憂軒歌〉, 하륜의 〈신도형승곡 新都形勝曲〉·〈도인송도곡 都人頌禱曲〉, 작자 미상의 〈유림가 儒林歌〉, 상진의 〈감군은 感君恩〉 등이 있다.

〈신도가〉 는 천도 후 새로운 도읍지에서 나라의 위엄을 기리며 자손 만대의 번영을 기약하는 내용이다. 〈감군은〉은 우리말 노래로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형태를 보인다. 이것들은 단련형식(短聯形式), 10장 이내의 연장형식, 그리고 후렴구를 덧붙인 형식 등으로 되어 있어 고려속요를 수용한 면모를 보인다.

이보다 늦은 시기의 국문악장으로는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이 있는데 100여 장이 넘는 장편형식이다. 〈용비어천가〉는 그 구조가 장(章) 단위로 완결되는 단시(短詩)의 성격을 지니면서 서정적 성격을 버리지 않은 교술시로 악장의 장르 형성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작품이다.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
한문악장

양적으로나 음악적 비중으로나 악장의 본래 영역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도전의 〈정동방곡 靖東方曲〉·〈문덕곡 文德曲〉·〈납씨가 納氏歌〉, 변계량의 〈천권곡 天眷曲〉·〈응천곡 應天曲〉, 예조(禮曹)의 〈축성수 祝聖壽〉·〈악장종헌 樂章終獻〉 등이 이에 해당한다. 〈납씨가〉는 태조가 원나라 나하추(納哈出)의 침공을 물리쳤던 공적을 찬양한 노래이다. 〈정동방곡〉은 동방을 평정한 공적을 기리면서 위화도 회군을 다룬 것으로, '위'(偉)로 시작되는 후렴구가 특이하며 경기체가와 흡사한 면이 있다.

〈정동방곡〉·〈납씨가〉와 같은 작품은 태조의 무덕(武德)을 칭송했기 때문에 〈무덕곡〉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문덕곡〉은 태조가 실행해야 할 정치의 도리를 제시한 점에서 〈무덕곡〉과 대조된다. 〈납씨가〉는 5언4구, 〈정동방곡〉은 3언4구(6언2구), 그리고 〈문덕곡〉은 7언6구이다. 이 세 곡은 원래 한문악장으로 창작되었던 것인데 뒤에 현토악장으로 바뀌었다.

한시의 형식이 두루 쓰였는데 시경체와 초사체에 가깝다. 변계량의 〈천권곡〉·〈응천곡〉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노래로 고려속요의 후렴구 형태를 수용한 면모를 보인다. 〈천권곡〉은 3언4구 5장으로 '위만수무강'이라는 후렴구가 있으며, 〈응천곡〉은 3언4구 10장으로 '하천복록'(荷天福祿)이라는 후렴구가 있다.

〈축성수〉·〈악장종헌〉 역시 임금의 성덕을 기리는 내용인데 3언4구의 한시에 후렴구가 붙어 있다. 특히 〈축성수〉는 경기체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후렴구에 '위영하황은경하여'(偉永荷皇恩景何如)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일련의 한문악장이 경기체가나 속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말 시가의 형식적 원리를 수용한 초기 한문악장은 그 역사적 전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토악장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데 작품세계의 독자성보다는 한시를 국문시가화하는 형태적 이행과정이 눈길을 끈다.

앞서 말한 〈문덕곡〉·〈납씨가〉·〈정동방곡〉 외에 윤회의 〈봉황음 鳳凰吟〉, 작자 미상의 〈북전 北殿〉, 예조(禮曹)의 〈경근곡 敬勤曲〉이 현토악장에 속한다. 현토악장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의 창제가 악장의 장르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훈민정음

작자와 장르적 특성

악장의 핵심 담당층은 조선의 개국에 참여했던 신흥 사대부로, 정도전·하륜·변계량·권근·윤회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새 왕조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이념적 기반의 구축으로서 악장의 효용성에 의미를 두었다. 여기에는 〈시경〉으로부터 도출해낸 유가적 시가관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악장의 창작자나 수용자들은 삼대지치의 재현이라는 보편적 이상을 표방함으로써 악장문학의 성격을 목적문학으로 확고히 했다. 조선초의 악장은 인간의 내면인 성정지정으로부터 군왕의 치공지성을 그려내어 풍자와 찬양의 효용가치를 작품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이 창작한 초창기 악장은 임금이나 왕조에 대한 아부의 표현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 창작의 악장을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악장이 지녀야 할 당위적 측면을 비교적 모범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용비어천가〉로 평가된다.

국문 시가의 형식적 전통을 수용한 초기의 국문악장 이래 〈용비어천가〉에서는 연장형식의 방대한 장편화와 독특한 분절형식으로 악장 특유의 양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표현양식은 〈월인천강지곡〉에도 적용되어 정착을 꾀했으나 음악을 선결조건으로 삼아야 했던 불리한 점 때문에 악장은 끝내 문학적인 안정을 얻지 못했다. 이미 있는 악곡에 가사를 맞추려 했기 때문에 문학으로서는 독자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초 악장의 창작은 조선 개국으로부터 성종대에 이르는 약 1세기 정도에서 그치게 된다.

악장은 궁중 가악에 쓰였기 때문에 〈악장가사〉·〈악학궤범〉에 그 가사가 전한다. 그밖에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도 보이며, 정도전의 작품은 개인 문집인 〈삼봉집 三峰集〉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