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

변계량

다른 표기 언어 卞季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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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69(공민왕 18)
사망 1430(세종 12)
국적 조선, 한국

요약 변계량은 정도전과 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진덕박사 등의 벼슬을 담당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다.

정도전·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 호는 춘정.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 옥란(玉蘭)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 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편찬했다. 저서에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