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시조

다른 표기 언어 時調

요약 원래 악곡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대에 시형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시조는 '시절가조'의 준말로서 이해되며 〈청구영언〉·〈해동가요〉 등에서는 '영언'이나 '가요'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시조의 기원은 한시기원설·별곡기원설·민요기원설·향가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발생시기는 고려말 13세기경에 고려가요의 악곡과 시형을 모태로 하여 발생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시조의 정형시형이 완성되기까지는 고려가요 이외에 여러 가지 시가형태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목차

접기
  1. 범주와 갈래
  2. 작품과 성격
  3. 음악적 성격

통상 4음보 율격으로 구성되는 3장으로 된 짤막한 단형시형으로 종장에서 독특한 율격적 변화를 거쳐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된다.

시조는 원래 악곡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시형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국악계에서는 여전히 시조곡이나 시조창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시절가'나 '시절단가' 등이 함께 쓰였던 점으로 미루어 시조라는 명칭은 '시절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시조는 가곡창을 시대적인 취향에 맞도록 개편한 유행가조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연유로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로서 이해되고 있다.

18세기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쓰여오던 명칭으로는 '단가'가 가장 일반적이었고, 그밖에 '시여'(詩餘)·'신조'(新調)·'신성'(新聲)·'신번'(新飜)·'신곡'(新曲) 등이 쓰였다. 또한 18세기 초·중엽에 편찬된 시조집의 명칭은 〈청구영언 靑丘永言〉·〈해동가요 海東歌謠〉로서, '영언'이나 '가요' 등이 쓰이고 있다. 이들 명칭의 대부분이 악곡을 일컫는 개념인 것은 시조라는 양식이 가창문학으로서의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조의 기원은 한시기원설·별곡기원설·민요기원설·향가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발생시기도 고려말 13세기 발생설, 조선초 15세기 발생설, 조선 중기 16세기 발생설 등이 맞서고 있어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러한 논의들의 대표적인 추세는 고려말 13세기경에 고려가요의 악곡과 시형을 모태로 하여 발생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시조와 같이 잘 다듬어진 정형시형이 완성되기까지는 고려가요 외에도 여러 가지 시가형태가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다.

범주와 갈래

시조는 사대부계층이 만들어내고 주도해나간 계층적 귀속성이 강한 문학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급격하게 확산되고 대중화되면서 시조를 쓰는 계층이 다양해졌다.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시조의 범주는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져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하위 갈래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형태적인 특성에 따라 단시조(短時調 : 평시조)와 장시조(長時調 : 사설시조), 단시조(單時調)와 연시조(連時調)로 나뉜다. 단시조와 장시조는 3장 구성의 길이나 3장의 각 구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뉘는데, 단시조는 3장 6구 45자 안팎의 비슷한 음수로써 채워지는 4음보격의 절제된 형식을 갖춘 것이고, 장시조는 이러한 정형적인 율격에서 다소 벗어나 형식적으로 풀어지면서 길어진 시조이다. 단시조와 연시조는 한 작품이 한 수로 완결되느냐, 연작들이 모여서 한 편을 구성하고 있느냐에 따라 나뉘는데 대개 오륜가류나 본격적인 도학시조류, 어부가류 등이 연시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조작가의 계층에 따라 사대부시조·기녀시조·가객시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들은 각 계층의 현실적인 입장과 처지가 달랐던 관계로 흥미로운 변별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시조는 오랜 시기에 걸쳐 있기 때문에 고시조·개화기시조·현대시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밖에도 작품의 제재에 따라 인륜·권계(權戒)·송축(頌祝)·염정(艶情)·규원(閨怨)·별한(別恨) 등으로 나누는 경우, 소재에 따라 시절류·화목류·금수류 등으로 나누는 경우, 작품세계의 경향성을 기준으로 삼아 자설적 시조와 타설적 시조로, 또는 기질지성의 시조와 본연지성의 시조로 나누는 경우 등이 있다. 그리고 음악상으로는 악곡의 종류에 따라 가곡창과 시조창, 시조창 내에도 창조(唱調)에 따라 평시조·중어리시조·지름시조·사설시조 등으로 나누고, 창법에 따라서는 경제(京制)·완제(完制)·영제(嶺制)·내포제(內浦制)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작품과 성격

고시조 자료는 일반적으로 개인 문집의 부록으로 전해오거나 18세기 이후에 편찬된 가집 속에 전해오고 있다.

드물게는 잡록류에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경우가 더러 있고, 한역(漢譯)된 형태로 전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 이러한 고시조 자료는 20세기 들어 최남선의 〈시조유취〉(1928)에 1,000여 수 집성되었으며, 정병욱의 〈시조문학사전〉(1966)에 2,300여 수, 심재완의 〈역대시조선서〉(1972)에 1910년 이전까지의 작품 3,335수가 집성·정리되었다.

시조는 사대부계층과 함께 성장해왔기 때문에, 작품세계가 사대부계층의 역사적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려말의 시조들은 대개 조선건국이라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대한 태도와 그로 말미암아 형성된 갈등이나 감회를 다루고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 길재의 〈회고가〉, 이색의 "백설이 자자진 골에……"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선초의 시조는 "대추볼 불거진 골에……"로 시작하는 황희의 시조나, "강호에 봄이 드니……"로 시작되는 맹사성의 〈강호사시사〉 등 태평송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과 계유정난의 소용돌이에서 사육신들이 지었다는 절의가(節義歌) 등이 알려져 있다.

사대부계층의 독자적인 미의식 세계를 반영한 시조는 16세기 사림파들의 시조로서, 이것들은 대개 문집에 덧붙어 전해오고 있다.

사림파의 시조는 그들의 문풍쇄신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운동은 성리학적인 이념을 사회화하고 내면화해나가는 사림파들의 광범한 생활운동의 일부였다. 이들의 시조는 대개 산수자연을 벗삼아 심성을 기르고 성정을 닦고자 하는 성리학적 이념 추구의 구도시(求道詩)라 할 수 있다. 사림파 시조의 이러한 세계를 조윤제는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명명한 바 있다.

강호가도는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사대부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와 고향의 임천(林泉)에 은거하여 수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은거처 주변의 산수자연을 성리학적 이념의 투사물로서 보는 상자연적(賞自然的)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강호가도적 사림파 시조는 자아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성리학적 이념의 일원적 질서 속에 놓여 있음을 믿는 경건성이 가미된 조화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강호가도의 이러한 이념은 사림파들이 견지하고 있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정치관이나 열정과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결국 사림파의 시조문학은 "물러나와 자기를 닦고 나아가서는 천하를 선하게 만든다"(退而自修 進而兼善)는 사림파의 진퇴관(進退觀)에 기초한 '은구(隱求)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초 송순·이현보·이황 등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강호가도는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승리하고 성리학이 무르익어가는 추세 속에서 16세기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문학의 관습적인 풍조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시조는 사대부계층 가까이에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계층이었던 기녀가객에게 자연스럽게 확대되었으며 이들 계층에 의해 시조의 세계는 새로운 경지가 개척되었다.

기녀층은 높은 교양 수준을 토대로 비교적 일찍부터 시조작가로 등장했다. 그들의 시조는 자신들의 현실적 처지와 입장을 반영하여 주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을 애틋하게 노래하고 있다. 가객층은 18세기에 들어서 시조의 작자층으로 등장했는데 사대부 시조를 모방하고 있는 측면이 두드러지지만 그들의 현실적 처지를 반영하여 사대부 시조와는 다른 측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자의식을 담아내는가 하면, 서민세계를 반영하여 애정행각이나 장사행위·세태풍자 등을 담아내기도 했다. 특히 후자는 사설시조의 세계로서 서민들의 생활세계를 반영한 사실주의적 문학으로 높이 평가되어왔다.

시조는 이러한 확산과정을 거쳐 19세기말에 이르면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정치선전의 도구로도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그리하여 개화기의 시조는 문명개화, 자주독립, 매국노 성토 등의 시사평론적인 내용을 두루 포괄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음악적 성격

노래로 부르는 시조는 영조 때 학자 신광수(申光洙)의 문집인 〈석북집 石北集〉에 처음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의 악보는 순조 때 학자 서유구(徐有榘)의 〈유예지 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 歐邏鐵絲琴字譜〉에 처음 보인다. 이 두 문헌에 전하는 악보는 서울에서 불렸다는 경제시조(京制時調)의 기본형인 평시조의 악보이다.

이는 모두 양금(洋琴)의 악보로, 구라철사금 또는 서금(西琴)이라고도 하는 양금이 시조 반주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조는 가객들이 가곡과 함께 부르면서 발전했으며, 각 지방에 널리 퍼져 향제시조(鄕制時調)가 나타나고 19세기에 들어서 변주곡이 파생되어 20세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시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3장 구조로 되어 있어 5장으로 구성되는 가곡과는 달리 중여음(中餘音)이나 대여음(大餘音)과 같은 전주곡·간주곡이 없기 때문에 가곡에 비해서 형식미가 떨어진다. 악기의 편성도 일정한 규칙이 없이 무릎장단을 치거나 장구와 선율악기 하나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쉽게 부를 수 있고 특별한 준비 없이도 어느 장소에서나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가곡에 비해 대중적이다.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는 종장 마지막 음보의 '하노라' 등은 생략한다. 시조를 지역에 따라 분류하면 서울은 경제시조, 충청도는 내포제, 경상도는 영제, 전라도는 완제 등으로 구분한다. 악곡형태에 따라서는 평시조·중거시조(中擧時調)·평조시조·두거시조(頭擧時調)·지름시조·사설시조 등으로 나눈다.

시조에 사용되는 장단은 5박장단과 8박장단이 있으며 이 2가지 장단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경제시조와 향제시조는 기본 장단법이 다르다. 경제는 피리·단소 등의 반주가 초장과 중장 끝에서 노래가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향제는 반주 없이 무릎장단 등으로 그냥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초장과 중장 끝에서 5박자가 줄어들어 짧아진다. 경제는 초장 : 5 8 8 5 8, 중장 : 5 8 8 5 8, 종장 : 5 8 5 8 이고, 향제는 초장 : 5 8 8 8, 중장 : 5 8 8 8, 종장 : 5 8 8이다.

시조의 음계는 대부분 계면조가 사용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전통음악의 다른 계면조곡들과 마찬가지로 시조의 계면조도 5음음계에서 3음음계나 4음음계로 변한다. 경제의 평시조와 중허리시조, 향제의 평시조와 사설시조는 황종·중려·임종의 3음음계로 되어 있다. 경제의 지름시조·사설지름시조·휘모리시조·여창지름시조는 황종·중려·임종·무역의 4음음계로 되어 있다.

그밖에 평조의 선법으로 노래하는 우조시조와 우조지름시조는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의 5음음계인 우조 또는 평조선법과 3음음계·4음음계가 혼합되어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