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이상은

다른 표기 언어 Li Shangyin , 李商隱 동의어 의산, 義山, 옥계생, 玉谿生, 달제어, 獺祭魚
요약 테이블
출생 812경
사망 858경
국적 중국, 당(唐)

요약 변려문체의 대가였던 영호초의 막료가 되어 그 작문법을 배우고 변려문으로 명성을 얻은 시인이 되었으나, 당 조정의 정쟁에 개입되면서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불우한 삶을 살았다.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太和 3)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765~837)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768~824)·유종원(柳宗元: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 온정균(溫庭筠:812경~780경)·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영호초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문학이 꽃을 피우고 관리로서 출발하게된 반면 그의 생애에 걸친 불운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무렵 당의 조정은 2개의 당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牛)·이(李)의 당쟁'으로, 귀족출신자로 이루어진 이덕유(李德裕) 일파와 진사출신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일파의 파벌투쟁이었다. 영호는 우승유파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급관료를 지향하는 한 그 당쟁에 개입되었으며, 이상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상은이 진사과에 합격한 것은 837년(開成 2)으로 26세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러 수도를 왕래했으나 번번이 낙제했는데,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綯)의 도움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 고개(高鍇)의 수하직에 간신히 합격했다. 그러나 곧 그의 은인인 영호초가 죽었다.

이듬해 그는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왕무원(王茂元)의 수하로 들어갔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꼈던 왕무원은 그를 막하로 불러들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윽고 왕무원의 추천으로 비서성 교서랑이 되었으며, 나아가 홍농위(弘農尉)에 올랐다. 그러나 왕무원이 이덕유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상은은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신당서 新唐書〉에는 "유·이의 당인은 이상은을 비웃고 비난했으며, 궤변이 많고 경박하며 도덕관이 결여된 자로서 두 파로부터 배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번째 비호자가 된 왕무원도 843년(會昌 3)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후 이상은은 더 곤궁해지고, 우·이 두 당 사이를 오갔다. 이덕유파의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다가 곧 좌천되어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도에게 애원하여 은혜를 잊은 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직책을 맡았다. 858년(大中 12)에 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시풍

이상은은 변려문의 대가이자 당대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두목(杜牧:803~852)과 함께 '만당의 이·두'로 불리며, 온정균과 더불어 '온(溫)·이(李)'라고 병칭되었다. 그의 시가 '서곤'(西崑)으로 불리게 된 것은 북송의 양억(楊億:974~1020) 등이 열심히 이상은을 모방하여 '서곤체'라는 시체가 풍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시체는 100가지 보석으로 만든 방과 1,000가지 실로 짠 그물 같으며(百寶流蘇 千絲鐵網), '옷 아래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퇴폐와 권태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이상은의 시는 난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의 원호문(元好問)은 그의 시에 주석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으며, 두보(杜甫)·이하(李賀:791~817)·왕건(王建)·이상은은 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 난해함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달제어'(獺齊魚)로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수달이 잡은 고기를 먹기 전에 깔끔하게 정돈해놓는 것처럼 시를 지을 때는 책으로 주위를 두르고 나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고(典故)를 시 속에 넣은 것은 육조시대 이래의 상투적인 수법이지만, 이상은은 그 기술을 극단으로 추구하여 흔히 쓰지 않는 전고도 서슴지 않았으며, 나아가 그 전고에 대해 자신의 상상력을 섞어넣었다. 이상은 시의 난해함은 그처럼 자신을 감추는 수법 때문이지만, 두 당 사이의 정쟁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간 데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율시에서 성취가 크며, 영사(詠史) 특히 연애시에 뛰어났다. 두보를 존경하고 이하의 영향을 받았다.

저작으로는 〈번남문집 樊南文集〉 8권과 〈옥계생시 玉谿生詩〉 3권이 전하며, 청대(淸代) 소납언(少納言)의 〈침초자 枕草子〉에 영향을 준 〈의산잡찬 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주석서로는 청대 주학령(朱鶴齡)의 〈이의산시집〉 3권, 청대 풍호의 〈번남문집상주 樊南文集詳注〉 8권, 〈옥계생시전주 玉谿生詩箋注〉 6권이 대표적이며 연보로는 민국 장차이톈[張采田]의 〈옥계생연보회전 玉谿生年譜會箋〉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