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련철폐투쟁

교련철폐투쟁

[ 敎鍊撤廢鬪爭 ]

시대명 현대

1970년대 초 정권의 교련강화정책에 반대하여 학생들이 전개한 투쟁.

정부가 71년 1학기부터 69년에 정규과목으로 채택된 교련교육을 종래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고 집체교육까지 부과, 재학중 무려 71시간의 군사교육을 받도록 제도화하고 교관도 전원 현역으로 교체하자, 학생들은 이를 학원병영화로 규정, 교련반대 실력행사에 돌입했다.

4월 2일 연대생 5백여 명의 교련거부 성토대회를 시발로 4월 6일 성대·고대·서울대생 1천여 명이 가두시위에 돌입한 데 이어, 4월 15일에는 서울시내 대학생 2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전개, 1학기 교련반대시위의 절정을 이루었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교련철폐와 현역교관 철수를 외치는 시위가 전대학가를 휩쓸던 중,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3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 학생 5명을 불법 연행·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10월 8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중앙정보부 폐지·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11~14일에는 전국 대학생 5만여 명이 <고대 난입군인 처단>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단행했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탄압조치로 일관, 10월 12일 「교련거부 학생은 전원 징집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 데 이어 15일에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 1,889명의 학생을 연행하고 그중 119명을 구속했다. 문교부는 시위주동 학생들을 제적시키도록 각 대학에 강요하여 23개 대학 117명을 제적시키고 이들을 즉각 입영조치하는 한편, 각 대학의 서클 74개를 해체하고 서울대 법대 <자유의 종> 등 14종의 간행물을 폐간조치했다. 이로써 교련수강거부에서 시작되어 7개월간 지속되며 학원자율화·사회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 교련철폐투쟁은 막을 내리고 더불어 학생운동도 당분간 동면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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