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사건

YH사건

[ -事件 ]

시대명 현대
연도 1979년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 4층강당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

66년에 설립,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로 급성장한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및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 데다 75년 노조가 결성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79년 3월 30일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노조는 4월 9일 대의원대회를 소집, 회사 정상화방안을 채택한 뒤 이를 관계기관에 발송하는 등 YH무역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회사 측과 정부당국이 시종 무성의한 태도로 나오자 4월 13일부터 장기농성에 돌입,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농성을 계속하려는 노동자들 간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마침내 8월 9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신민당사 농성을 감행했다.

YH무역사태가 국회에서 정치문제화되는 등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여 극도로 긴장해 있던 박정희 정권은 8월 11일 새벽 2시 이른바 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난입, 농성노동자 172명을 강제해산시키고 신민당 의원 및 취재기자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양이 추락, 사망하고 1백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직후 신민당의원들이 를 규탄, 18일간의 항의농성에 돌입한 데 이어, 종교계·언론인·자유실천문인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민주청년협의회 등 여러 민주화운동세력이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YH사건은 명실공히 노동자에서 보수야당에 이르는 범민족세력의 공동전선을 형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김영삼총재 제명파동과 부마민중항쟁으로 이어져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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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탕트와 박정권의 위기
6. 유신독재체제의 수립
YH사건 지금 읽는 중
7.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8. 7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 민족문화운동의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