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모방 노동자투쟁

한국모방 노동자투쟁

[ 韓國毛紡勞動者鬪爭 ]

시대명 현대

한국모방(나중에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투쟁.

일당 320원의 저임금, 상여금 미지급, 10분 지각에 특근 1시간 공제, 3년 미만 근무시 퇴직금에서 중식대 공제 등 회사 측의 온갖 횡포에 맞서는 한편, 무능노조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한국모방 노동자들은 1972년 7월 8일 <한국모방노동조합 정상화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8월 17일 우여곡절 끝에 열린 노조대의원대회에서 지동진이 지부장에 당선되자, 회사 측은 이튿날부터 해고 14명, 부서이동 25명 등 열성적 노조원을 무더기 징계하는가 하면, 지동진을 구타,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히는 등 노조를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나왔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 5백여 명은 8월 22일 에서 농성에 돌입, 6개항 요구사항 수락 합의하에 귀사했으나 회사 측은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노조간부들을 고발, 9월 4일 노조간부 14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에 조합원들이 또다시 농성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교선부장 방용석과 총무부장 정상범 2명만 구속하고 지부장 등 나머지 12명은 석방했다. 이후 조합원들은 태업을 계속하는 등 끈질긴 투쟁 끝에 임금인상을 쟁취하고 단체협약을 체결,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후에 원풍모방노조로 바뀐 한국모방노조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 종교계의 지원을 받으면서 70년대 민주노조의 가장 강력한 보루로서 위치를 굳혔으나, 80년 5·17 이후 정권의 모진 탄압 속에서 노조를 지키려는 조합원들의 2년여에 걸친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82년 9월 30일 해체됨으로써 70년대 최후의 민주노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원풍노조의 해고자들은 84년 이후 노동자복지협의회 건설에 중심축이 되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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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8. 7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 민족문화운동의 형성
10. 북한의 주체사상 확립
1. 광주민주화운동과 신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