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중항쟁

부마민중항쟁

[ 釜馬民衆抗爭 ]

시대명 현대
연도 1979년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이 전개한 반독재민주화투쟁.

총재 의원직제명안이 변칙통과된 직후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하던 부산에서는 10월 16일 부산대생 4천여 명의 교내시위를 계기로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 오후 8시경 부산시청 앞에 집결한 학생·시민 3천여 명은 유신철폐·독재타도·야당탄압 중지 등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다가 폭력투쟁으로 돌입, 파출소·어용신문사에 투석하고 경찰차에 방화하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17일 저녁에도 남포동·광복동·충무동 일대에서 시위가 계속되어 충무파출소·KBS·서구청·부산세무서가 파괴되었다. 이틀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차량 6대가 전소, 12대가 파손되고 21개 파출소가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1,058명이 연행되어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경찰력으로 사태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을 투입,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학생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마산대생과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충돌하며 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타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중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선포,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강경 무력진압을 편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민중항쟁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은 채 16일에는 이화여대 시위, 19일에는 서울대 시위 및 전남대 시위, 24일의 계명대 시위 등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는 한편, 권력 내부의 암투와 맞물려 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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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탕트와 박정권의 위기
6. 유신독재체제의 수립
부마민중항쟁 지금 읽는 중
7.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8. 7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 민족문화운동의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