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

10·26사태

[ 十二六事態 ]

시대명 현대
연도 1979년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가 현직 장인 의 총탄에 맞아 암살당한 사건.

10·26사태의 진상은 현재까지 흑막에 가려져 있으나, 당시 군수사부의 발표에 의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의 신임을 받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 무렵 정보업무 수행과정에서의 무능을 이유로 박정희로부터 몇 차례 힐책을 받은 데다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에 의해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등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중,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박정희와 만찬을 함께 할 기회가 생기자 이 기회에 암살하기로 결심, 계획을 실행할 준비를 하는 한편, 암살 직후 쿠데타를 일으킬 목적으로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차장보 김정섭을 궁정동 별관에 대기시켰다. 5시 40분경 김계원(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이 먼저 도착하자 김재규는 그에게 차지철 살해를 암시했고, 평소 차지철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김계원은 동조하듯 이를 묵인했다. 6시 5분경 만찬이 시작되었고 식사 중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부재 탓으로 돌려 김재규를 힐난한 데 이어 차지철이 과격한 어조로 그를 공박하자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갖고 만찬회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속부하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사살할 것」을 지시, 7시 35분경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그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각각 2발씩을 쏘아 두 사람을 절명시킴으로써 18년간의 1인독재정권과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사건 직후 보안사령관은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은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김계원·박흥주·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10·26사태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채 박정희와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사감 때문이라는 설, 김재규 자신의 말대로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보고 박정권의 정당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사건 전날인 25일 아시아협회 주최의 만찬회에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베시 육군참모총장이 한 발언 등을 근거로 미국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설 등 논란이 구구하나, 이는 민중항쟁이 격화되면서 위기에 직면한 정치권력의 내분이 빚어낸 결과로 YH사건·총재 제명파동·으로 이어진 역사 흐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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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탕트와 박정권의 위기
6. 유신독재체제의 수립
10·26사태 지금 읽는 중
7.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8. 7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 민족문화운동의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