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항명파동

10·2항명파동

[ 十二抗命波動 ]

시대명 현대
연도 1971년

1971년 10월 2일 야당 측이 제기한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이 일부 공화당 의원의 가세로 가결됨으로써 공화당의 숙당(肅黨)으로 이어진 사건.

71년 9월 30일 원내 제1야당인 이 물가고·실미도(實尾島) 군특수범난동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김학렬(金鶴烈) 경제기획원장관, 오치성 내무장관, 신직수(申稙秀) 법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발의하자, 10월 1일 는 공화당 간부를 청와대로 불러 해임안 부결을 지시하고 당내 결속과 소속의원의 단결을 당부했다. 그러나 김종필계의 당내 주류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성곤(金成坤)·길재호(吉在號) 등 당내 비주류 인사가 신민당과 손잡고 주류인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중대한 항명행위로 규정, 공화당에는 숙당선풍이 몰아쳤다.

그 결과 10월 5일 항명을 주도한 길재호·김성곤 두 의원이 탈당, 의원직을 상실했고, 김창근(金昌槿)·문창탁(文昌鐸)·강성원(康誠元) 의원이 당명불복종 이유로, 오치성 의원이 당론분열 조성 이유로 6개월간 당권정지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의원 신분침해시비로 여야가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69년 4월 8일 신민당이 제기한 권오병(權五炳) 문교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공화당 의원들의 동조로 가결시킨 데 이어 두 번째의 항명파동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집권 이래 끈질기게 계속되어온 공화당내의 당권경쟁과 암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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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제개발과 민중수탈
4. 북한의 자주노선
5. 데탕트와 박정권의 위기
10·2항명파동 지금 읽는 중
6. 유신독재체제의 수립
7.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