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노선

병진노선

[ 並進路線 ]

시대명 현대

남한에서의 군사쿠데타 및 쿠바사태·중소분쟁 격화 등 불안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방침. <병진노선>이란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어느 하나도 약화시키지 않고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노선의 채택은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국방부문에 돌려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방 건설을 강조하는 <군사파>의 강경노선과 국방건설의 강조가 초래할 경제 발전의 지연과 주민생활의 침체를 이유로 이에 반대하는 <당료파>의 온건 노선 사이에 정책적 논쟁이 대두되었다. 이 논쟁은 의 격화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및 흐루쇼프의 실권 등의 상황을 고려, 66년 10월에 열린 당 대표자대회에서 에 의해 병진노선의 재확인으로 일단락되었으며, 그 결과 자주·자립정책에 기초한 경제건설과 함께 국방의 강화가 계속 확대 추구되었다.

그러나 병진노선의 재확인과 관철로 인한 국방비의 지속적 증대는 경제건설의 지연과 7개년 계획의 3년 연기를 불러와 66~69년 사이에 다시 당내논쟁을 재연, 심화시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온건파의 박금철 등은 「경제가 발전하여 그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생산을 계속 빠른 속도로 높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경제건설의 속도를 늦추고 과도한 국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조정, 중공업과 경공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당과 국가가 사상혁명을 강화하고 국가의 경제조직자적 기능을 높여 대중을 동원하면 경제를 끊임없이 높은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 박금철 등을 소극분자로 비판했다.

이후 병진노선을 관철하면서 사회주의 공업화의 완수를 위해 67년 6월에 열린 당중앙위 16차 전원회의는 <달리는 천리마에 박차를 가하여>라는 구호와 더불어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킬 것을 제기했고, 또한 7개년 계획의 마지막 수행을 위해 70년에는 생산량을 그 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배로 높이는 새로운 천리마속도로서 <강선속도>를 제기, 7개년 계획을 마무리함으로써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화와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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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제개발과 민중수탈
4. 북한의 자주노선
병진노선 지금 읽는 중
5. 데탕트와 박정권의 위기
6. 유신독재체제의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