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

[ 光州民主化運動 ]

시대명 현대
연도 1980년 ~ 1980년

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항쟁. 한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광주민중봉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88년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화되었다.

전개과정

10·26 이후 민주화 일정이 지연되자 광주시내 대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도청으로 진출, 16일에는 <민주화대성회>라는 시국성토대회를 가진 뒤 횃불시위를 감행했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교내 출입이 차단된 전남대생들은 18일 오전 교문 앞에서 무장공수단과의 충돌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도심지에서 시위를 확산시켰으나 공수부대에 의해 곤봉과 대검으로 무자비하게 살상당했다.

이튿날 학살소문을 접한 시민과 학생들은 금남로를 중심으로 경찰과 대치했으나, 출동한 공수대원들에 의해 가톨릭센터·공용터미널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잔혹하게 유혈진압당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시민들은 20일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 시청 접수, 광주문화방송국 방화, 21일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한 자체무장 등 적극적인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시위를 삽시간에 시가전의 양상으로 일변시켰다. 21일 오후 6시경 마침내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할 조직을 편성하는 한편, <투사회보>를 발행, 선전활동을 하고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개최, 시민들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수렴하는 등 뛰어난 자치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사태수습 전에 군투입 금지 △사후보복 금지 △사망자 보상 등 7개항의 요구조건의 관철을 내걸고 무기회수에 나선 와 이들의 행위를 투항주의로 규정, △현정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학살원흉 처단 △구속인사 석방과 구국과도정부 수립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결사항전파와의 의견대립으로 항쟁지도부간의 균열이 생긴 가운데, 군내에서는 강경파가 조기진압을 명령, 계엄군은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 1시간 40여 분 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결사대원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주 금남로의 시위(1980.5.19).

광주 금남로의 시위(1980.5.19).

5·18민주화운동수습대책위원회

5·18민주화운동수습대책위원회

전남도청 지하실의 무장시민군.

전남도청 지하실의 무장시민군.

결과 및 의의

광주민주화운동은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무력으로 권력장악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겨 80년대 반정부투쟁 및 민주화운동의 핵심적 쟁점이 되었다. 한편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세력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어, 7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을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한편, 기층민중을 변혁주체세력으로 확고부동하게 인식하는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던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5월 22일 광주시위 진압작전에 투입할 예하 4개 대대의 한국군의 병력차출과 미국이 항공모함과 공중조기정보 통제기를 배치한 사실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80년대 반미감정 확산 및 반미 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광주학살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려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 등 광주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증언청취가 이루어지고 공직사퇴 등 일정한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망자수·발포책임자 등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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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 민족문화운동의 형성
10. 북한의 주체사상 확립
1. 광주민주화운동과 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지금 읽는 중
2. 6월항쟁과 5공화국의 몰락
3. 제6공화국의 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