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고문치사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

[ 朴鍾哲拷問致死事件 ]

시대명 현대
연도 1987년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살, 언어학과 4년)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朴種雲, 26살, 사회학과 4년 제적)의 소재 파악을 위한 조사를 받던 중 수사요원 조한경(趙漢慶) 경위와 강진규(姜鎭圭) 경사의 고문으로 숨진 사건.

당초 경찰은 「책상을 <탁>치자 <억>하고 쓰러졌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으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최초 검안의 오연상(吳演相)의 증언과 부검의의 증언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경찰은 자체조사에 나서, 사건발생 5일 만인 1월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는 한편,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고문치사)혐의로 구속했다. 사건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이 임시국회소집과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는 등 정부 여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는 한편, 재야종교단체들의 규탄성명 발표, 진상규명요구 농성, 각계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 발족, 등 정국은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이에 정권은 김종호(金宗鎬) 내무부장관과 강민창(姜玟昌) 치안본부장의 전격해임, 고문근절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발표를 계기로 이 사건이 박처원(朴處源) 치안감, 유정방(劉井邦) 경정, 박원택(朴元澤) 경정 등 대공 간부 3명에 의해 축소조작됐으며,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내연하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폭발했다. 정부는 5월 26일 노신영(盧信永) 국무총리,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정호용(鄭鎬溶) 내무부장관, 김성기(金聖基) 법무부장관, 서동권(徐東權)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으나,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어 곧바로 으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은 5공 몰락의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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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고문치사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 고 박종철 1주기 추모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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