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 007기 피격사건

KAL 007기 피격사건

[ -○○七機被擊事件 ]

시대명 현대
연도 1983년

1983년 9월 1일 새벽 3시 26분 사할린 인접 해역 1만m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 수호이 15기가 발사한 2발의 공대공 미사일이 대한항공 소속 007 점보 여객기를 격추시켜 269명의 인명을 몰살시킨 참사.

8월 31일 0시 5분(한국시간 31일 낮 1시 25분)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KAL 007기는 31일 오후 8시 37분 앵커리지 공항에 착륙, 승무원을 전원 교체(기장 천병인(千炳寅), 부기장 손동희(孫東熙))한 후 9시 59분 다시 운항길에 올라, 알래스카 남단 캄차카 반도의 남쪽, 일본의 혼슈(本州) 상공을 넘어 강릉·서울로 이어지는 R-20 항로에 들어섰으나, 앵커리지를 출발한 직후부터 예정항로보다 우 측(북쪽)으로 이탈, 결국 소련관할 비행정보구역 내의 인접 공해상공에 들어간 데 이어 캄차카 반도와 사할린섬 및 그 주변의 영해 상공인 소련영공으로 들어갔다. 이 KAL기를 첩보기로 오인한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공격을 가함으로써 KAL기는 그대로 격추되어 사할린 섬 서남쪽 동해에 가라앉고,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사건발생 후 국제민간항공기구 ICAO는 제한된 증거와 상황설정에 의한 추 측을 기반으로 ①소련 요격기들은 캄차카 반도 상공과 사할린 섬 부근에서 KAL 007기를 요격하려고 시도했고, ②소련당국은 KAL기를 <첩보기>로 간주, 육안관찰을 통해 이 비행기를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③KAL기는 최종 요격시 1만 60m에서 1만 700m로 고도상승을 함으로써 도피행동처럼 보여 <첩보기>라는 의심을 굳혀주었고, ④KAL 007기 승무원들은 요격시도를 몰랐던 것 같다는 내용의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완전무결한 계기에 의해 운항하는 최신 여객기가 어떻게 항로를 이탈할 수 있었는가, 소련은 왜 비무장 민간여객기를 격추시켰으며 격추명령은 누가 내렸나, RC-135 미국 첩보기는 왜 비슷한 시간에 정찰을 했는가 등 많은 의혹을 남겼다. 사건발생 직후 정부는 소련을 격렬히 규탄하는 한편, 소련 영토 내의 국제행사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올림픽에 소련을 참여시키기 위해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음으로써 민항사상 유례가 드문 참극은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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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피격해역을 찾은 희생자 유족.

KAL기 피격해역을 찾은 희생자 유족.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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