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시티의 역사

파나마시티의 역사

가. 식민지 시기

파나마시티는 본래 어촌이었다. 식민 초기에는 70여 채의 오두막에 약 400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이 정착민들은 1532년 페루의 정복이 끝나자, 대부분 페루로 이주했다. 이듬해까지 이 지역에 13명의 에스파냐 남성 정착민들이 500여 명의 원주민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콜럼버스가 제4차 항해에서 파나마 지협의 대서양 연안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항구라는 의미로 ‘포르토벨로(Portobelo)’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1519년 8월 15일 에스파냐의 정복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Pedro Arias de Dávila)가 처음으로 시가지(현재의 파나마 비에호 고고 유적지)를 건설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에서 에스파냐 인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였다. 도시는 잉카 제국으로 향하는 탐험대의 출발지이자 무역로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안데스 주변 국가들의 금과 은은 파나마시티를 거쳐 에스파냐로 반출되었다. 주교청과 왕립 재판소 등이 건립되는 등 점차 번성하던 도시는 대화재, 지진, 폭동 등으로 인해 황폐해졌다. 특히 1671년에는 해적 헨리 모건(Henry Morgan)이 침략했을 때 발생한 대화재로 약 4,000명이 사망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 푸른길

1673년 안토니오 페르난데스 코르도바 멘도사(Antonio Fernández de Córdoba y Mendoza)는 구 시가지에서 8㎞ 남쪽의 반도 지역에 신도시(현재의 카스코 비에호 역사 지구)를 건설했다. 신도시는 유럽의 계획 도시 개념을 적용하여 격자형으로 설계되었고, 해적을 막기 위한 요새도 건설했다. 건설 당시 인구는 약 900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무역이 번성하면서 1700년대에는 2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몰락에 의한 영향과 1737, 1756, 1781년에 일어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고, 도시는 점차 쇠퇴하여 1790년대에는 도시의 인구가 7,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751년에 누에바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령에 편입되었고, 1821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한 주로 합병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gold rush) 시기에 대서양(카리브 해)의 콜론(Colón)과 파나마시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사이의 경유지가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파나마시티를 거쳐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프랑스가 파나마 운하 건설에 뛰어든 1890년대 건설과 상업이 활성화되기도 했지만, 19세기 말 운하 회사의 파산으로 다시 침체기를 겪었다.

나. 운하 건설 이후

파나마시티는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한 1903년에 수도가 되었다. 이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둘러싼 미국 등 강대국 간의 갈등과 협상의 결과였다. 미국이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고, 1903년 11월 3일 파나마시티의 주민들이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미국 함대가 이를 저지하여 파나마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졌다. 1904년에 파나마 운하와 그 주변 8㎞ 이내가 포함된 파나마 운하 지대(Panama Canal Zone)가 미국에 조차(租借)되는데, 이때 파나마시티는 제외되었다.

파나마시티는 파나마 운하의 건설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건설 공사를 위해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 해 여러 지역에서 흑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이는 파나마시티뿐만 아니라 파나마의 인종적 구성과 사회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흑인 노동자들은 영어를 사용하며, 도시의 주요 계층으로 성장했다. 도시는 교역의 증대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도로, 상하수도, 위생 등이 개선되었으며, 전신, 철도, 의료 등 각종 현대적 시설이 들어섰다. 특히 벨리사리오 포라스(Belisario Porras) 대통령의 재임 기간(1912~1916)에는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만성적인 주택 부족이 발생했지만, 운하 지대의 배후 도시로서 발전을 계속했다. 파나마시티는 190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까지 중요 도시로 부상한다.

한편 파나마시티는 운하 지역의 주권 회복을 위한 활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959년 11월 3일 독립 기념일에는 파나마시티에 파업과 폭동이 발생했고, 1963년에 발생한 폭동에서 미국과 파나마 국민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9년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할 당시에는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 장군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공격의 주요 목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파나마 운하 인도 및 주둔 미군(미국 남부 사령부)은 1999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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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파나마시티

파나마 파나마시티 12월(여름), 오전 11시, 흐림. 포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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