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데쿠바의 역사

산티아고데쿠바의 역사

산티아고데쿠바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2차 항해에서 발견되었다. 산지 지형이기 때문에 방어를 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보여, 이 지역에 세례를 주고 왕의 항구라는 뜻의 ‘푸에르토델레이(Puerto del Rey)’라고 이름 붙였다.

산티아고데쿠바는 1515년에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에스파냐가 쿠바에 세운 7개 마을 가운데 마지막 마을이었다. 에스파냐 인들은 이 지역에서 금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후 시가지에서 27㎞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동광이 발견되었다. 이 동광은 쿠바의 첫 번째 광산이 되었으며, 이 지역의 이름을 ‘동광산’이라는 뜻의 엘코브레(El Cobre)라고 하였다.

산티아고데쿠바는 1518년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와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ba)가 멕시코 해안 지역을 탐사할 당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또한 1538년에 플로리다(Florida)를 탐험한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도 이곳에서 출발하였다. 1522년부터 1589년까지는 쿠바의 에스파냐 식민지 수도였다. 도시가 세워진 이래 이곳의 시가지는 해적들의 공격과 지진의 피해로 인해 파괴와 재건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산티아고데쿠바는 쿠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도시이다. 에스파냐의 식민 시기에 서구 열강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1553년에 프랑스 군대와 1662년에 영국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와 아프리카 문화에 프랑스 및 카리브 해 지역의 문화가 더해졌다. 1898년에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에스파냐 군대는 산후안 언덕과 카네이(Caney)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였으며, 파스쿠알 세르베라(Pascual Cervera)가 이끌던 에스파냐 함대가 산티아고데쿠바 만에서 미국 함대에게 크게 패하였다.

산티아고데쿠바는 카리브 해 지역에서 쿠바로의 이주가 집중된 지역이었으며, 유입된 인구는 이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1791년에 일어난 아이티 노예 혁명의 영향으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아이티에서 프랑스 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티 사회의 자본가 계층이었으며, 이들을 통해 커피 재배 기술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이로써 당시부터 현재까지 산티아고데쿠바 지역은 마에스트라 산맥의 고지대를 이용한 쿠바 커피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가. 쿠바 혁명의 발상지 산티아고데쿠바

산티아고데쿠바는 쿠바 혁명이 시작된 곳이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활동했던 도시이다. 또한 쿠바의 혁명가 중 한 사람인 프랑크 파이스(Frank País)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1953년 6월에 카스트로가 이끄는 100여 명의 혁명군이 몽카다(Moncada) 병영을 공격함으로써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1898년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 이후 쿠바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미국에 대한 반감과, 당시 암살과 군권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의 폭정이 쿠바 혁명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혁명군의 작전은 허술하였고, 이들의 기습 계획이 정부군에 알려지기까지 하여 몽카다 병영을 공격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체 게바라(Che Guevara)를 만나게 되었다.

카스트로의 망명 이후, 파이스는 학생 및 노동자 세력을 규합하여 비교적 잘 조직된 혁명군, 특히 대규모의 도시 저항군을 조직하였다. 이 파이스의 저항 세력은 이후 쿠바 혁명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힘을 모은 카스트로는 1956년 11월 30일에 그란마(Granma)호를 타고 산티아고데쿠바의 남쪽 해변에 상륙하였다. 그란마호가 안전하게 상륙하도록 돕기 위하여 당시 경찰서를 혁명군이 습격하였으나, 이 정보가 새어 나가 혁명군의 대부분이 사살당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의 10여 명은 결국 마에스트라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2년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체 게바라가 지휘한 혁명군이 산타클라라(Santa Clara)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티스타 대통령은 1958년 12월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1959년 1월 1일에 카스트로는 산티아고데쿠바로 돌아와 시청 발코니에서 쿠바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나. 자비의 성모

멕시코에서 과달루페의 성모(Nuestra Señora de Guadalupe 또는 Virgen de Guadalupe)를 믿는 것과 유사하게 쿠바에서는 자비의 성모(Virgen de la Caridad del Cobre)를 믿는다. 1916년에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o XV)는 자비의 성모를 쿠바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1998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uan Pablo II)는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자비의 성모 성당(Basilica Santuario Nacional de Nuestra Señora de la Caridad del Cobre)을 직접 방문하여 ‘쿠바의 여왕’이라 명명하였다. 2012년 자비의 성모 400주년 기념식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참석하였다.

자비의 성모는 1612년에 산티아고데쿠바 근처의 엘코브레(El Cobre)에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1612년, 엘코브레에 살고 있던 흑인 노예 소년 후안 모레노(Juan Moreno)는 두 명의 원주민 형제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소금을 사러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서 배가 뒤집어졌는데, 그때 빛으로 둘러싸인 성모가 세 사람을 구해 주었다. 이후, 1687년 당시 85세의 후안 모레노가 이 사건을 문서로 작성하면서 자비의 성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738년에 모레노의 문서를 근거로 엘코브레에 자비의 성모 성당을 세웠다.

자비의 성모는 쿠바 인들의 종교적 상징일 뿐 아니라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898년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 당시 자비의 성모 왕관과 보석이 도난당하자, 당시 쿠바 국민들은 성금을 모아서 새 왕관과 장식품을 마련하였다. 쿠바 혁명 이후 쿠바 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살고 있는 마이애미(Miami)의 비스케인 만(Biscayne Bay) 언덕에도 자비의 성모 성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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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니카라과
15. 온두라스
16. 쿠바
17. 과테말라
18. 파나마
19. 코스타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