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역사

아바나의 역사

가. 에스파냐의 지배

1514년에 판필로 나르바에스(Pánfilo Narváez)가 쿠바 남부 해안에 아바나를 처음 세웠으나, 이 지역의 기후와 토질이 주거에 알맞지 않았다. 이후 에스파냐 인들은 계속해서 적절한 도시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1519년 다섯 번째 시도 끝에 쿠바 섬 서쪽에 있는 푸에르토데카레나(Puerto de Carena) 주변에 아바나를 세웠다. 이후 아바나는 에스파냐 식민지와 본국을 잇는 가장 주요한 항구가 되었다. 초기 아바나는 서인도 제도로 향하는 군인이나 선원들이 들러서 식량과 물을 보충하는 중간 기항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신대륙 정복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카리브 해에서 창궐하던 해적들의 주요 침략지가 되었다.

초기 아바나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지자, 당시 쿠바 총독은 쿠바의 수도를 산티아고에서 아바나로 옮기고자 하였다. 산티아고 지역의 원성이 높았지만 당시 히스파니올라 섬에 있던 에스파냐 왕립 재판소는 수도 이전을 승인하였다. 1592년 아바나는 펠리페 2세(Felipe II)로부터 ‘도시(ciudad)’라는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1607년에 쿠바의 수도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바나는 에스파냐의 카리브 해 지역 개척의 주요 기항지로서 식민지의 값진 화물을 수송하는 선단(船團), 즉 플로타(flota)가 에스파냐로 출발하는 주요 항구가 되었고,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끝날 때까지 에스파냐 식민지의 교역과 사탕수수 및 담배 재배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였다.

아바나의 건설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1519년 판야나무 아래에서 산크리스토발데라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를 건설하기 위한 첫 번째 미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장소는 1829년에 세워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 엘템플레테(El Templete)로 알려져 있다.

1538년부터 1555년 사이 아바나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여러 차례 불탔으며, 1586년에는 영국의 해적인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위협을 여러 차례 받았다. 1640년에 네덜란드의 해군 함대가 아바나 앞바다에 출몰하였으나, 허리케인 때문에 상륙하지는 못하였다. 1540년에는 아바나의 첫 번째 요새인 라푸에르사(La Fuerza)가 건설되었으나, 15년 후에 프랑스 해적인 자크 드 소어(Jacque de Sores)에 의해 파괴되었다. 1577년에 그 자리에 헤알푸에르사 요새(Castillo de la Real Fuerza)를 건축하였다. 헤알푸에르사 요새는 이후 산프란시스코데파울라 교회(Iglesia de San Francisco de Paula)와 함께 아바나 시가지의 주축이 되었다.

아바나를 침략하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1675년부터 70년간 도시를 에워싸는 성벽을 건설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10m, 폭은 1.4m, 길이는 4,892m에 이르렀다. 초기에 2개뿐이었던 성문은 이후 9개까지 늘어났다. 낮 동안 열어 놓았던 성문은 밤 9시에 닫았는데, 이때 아바나 만 건너편의 카를로스 요새(Fortaleza de San Carlos de la Cabaña)에서 대포를 쐈다고 한다. 성곽은 19세기 아바나 시가지의 확장으로 대부분 없어지게 되었고, 몇몇 지점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835년에는 수로가 건설되었고, 1837년에는 쿠바의 첫 번째 철도인 아바나와 베후칼(Bejucal) 간 철도가 개통되었다. 1838년에는 타콘 극장(Teatro Tacón)이 문을 열었다. 아바나에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사치품 상점이 번성하였으며, 구시가지의 주택을 상점과 사무실로 개조하고, 외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 미국-에스파냐 전쟁과 미국의 영향

1898년에 아바나 항에서 미국의 전함 메인(Maine)호가 침몰하자,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에 패한 에스파냐는 쿠바를 독립시키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등을 미국에 이양하였다. 이후 1959년 쿠바 혁명까지 아바나는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쟁으로 파괴된 시가지들은 빠르게 복구되었으며, 미국과의 긴밀한 경제적 협력으로 아바나의 경제 또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아바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중산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아바나는 겨울의 온화한 기후와 역사 지구의 유적지를 바탕으로 북아메리카 지역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 산업이 발달하였다. 아바나에 고급 호텔이 들어서고, 카지노와 유흥 시설이 들어섰으며, 클럽 음악, 클럽 무용,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 등 다양한 관광 관련 문화가 발달하였다. 1958년에 아바나를 방문한 미국인의 수가 30만 명을 넘었고, 아바나는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주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다. 쿠바 혁명 이후

1959년에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친미 독재 정권이었던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은 무너졌다. 혁명 이후 들어선 새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 및 민간이 소유하던 대부분의 산업과 재산을 국유화하였으며, 1969년까지 모든 형태의 상업 활동을 국유화하거나 금지하였다. 그 대신에 정부는 사회 서비스 및 공공 주택을 강조하였다. 이에 미국은 쿠바의 사회주의 정부에 대하여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정권은 자본주의 및 미국계 자본을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관광 산업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미국의 자본 및 관광객이 도시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아바나의 경제 활동은 혁명 이후 쇠퇴하였다. 혁명 이후 수십만 명의 쿠바 인이 미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아바나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빠져나갔다. 아바나를 탈출한 많은 쿠바 인들은 아바나로부터 370㎞ 정도 거리에 있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 정착하였다. 마이애미에 쿠바 인들이 정착한 이후 쿠바계를 중심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와 자본이 유입되었다.

혁명 이후 쿠바는 미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긴장시켰다.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소련의 붕괴 직후, ‘특별한 시기’라고 불리는 1990년대 초반에는 기본적인 소비재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하였다. 이에 아바나 시에서는 도시 내에서 텃밭을 가꾸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도시 농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이후 서구 도시의 도시 농업에 영향을 미쳤다.

쿠바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관광업을 진흥시켰다. 관광객과 관광 수입의 대부분이 아바나, 특히 역사 지구에 집중되었다. 이에 쿠바 정부는 이중 화폐 제도를 실시하여 관광 수입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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