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과의 역사

마나과의 역사

가. 식민지 이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니카라과를 발견하기 이전의 마나과 호수 주변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니카라과에 원주민이 정착한 시기는 약 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마나과 호수 주변 아카왈린카(Acahualinca)의 화산 이토층(火山泥土層)에서는 2,100여 년 전 인간의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 유적은 마나과가 수천 년 전부터 원주민이 거주한 곳이었음을 보여 준다. 주로 초로테카 족(Chorotecas)이라는 부족의 거주지로 추정되지만, 당시 촌락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나. 식민 시대

1502년 콜럼버스는 제4차 항해 기간에 니카라과의 동해안을 발견했다. 16세기에 니카라과는 에스파냐의 정복대가 도착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전제와 학살, 광산 지대로의 강제 이주, 전염병 전파 등으로 원주민 부락이 급속히 파괴되었다.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이 적었던 니카라과에서는 원주민의 노동력으로 농경과 가축을 생산하는 이른바 엥코미엔다(encomienda)가 설치되었다.

에스파냐는 곡물과 육류를 생산하여 남아메리카의 광산 및 도시 지대로 수출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동원했다. 마나과는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식민 도시로 건설된 레온(León)과 그라나다(Granada)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낮은 도시였으며, 원주민이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곳이었다. 독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던 1819년, 에스파냐의 페르디난트 7세(Ferdinand Ⅶ)는 마나과에 ‘충성스러운 도시 마나과(Leal Villa de Santiago de Managua)’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다. 독립 이후

에스파냐 세력이 약화된 1821년 과거 정복자의 후손들이 니카라과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한 탓에, 토지와 무역 정책 등을 둘러싸고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내전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마나과는 니카라과의 수도로서 독립 이후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었다. 1855년에는 미국 노예상인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가 용병을 이끌고 마나과를 점령했다. 워커는 미국과 영국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아 이듬해 스스로 니카라과의 대통령에 취임하고, 다른 지역의 정복을 시도했다. 1857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들은 서로 힘을 합쳐 윌리엄 워커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1857년 마나과는 니카라과의 수도가 되었다. 마나과가 경쟁 도시였던 레온과 그라나다를 제치고 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두 도시가 계속된 내전과 갈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1857년 그라나다가 윌리엄 워커의 용병들에게 파괴되면서, 마나과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게 되었다. 이후 마나과는 행정 기관, 기반 시설, 서비스 등이 완비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1876년과 1885년의 대홍수, 1885년과 1931년의 대지진, 1936년의 대화재 등으로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마나과 호수에 인접한 행정 및 상업 지구를 중심으로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나과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였으나, 1972년 12월에 또다시 대지진이 발생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대지진으로 마나과 시가지의 90%가량이 파괴되고 약 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도시 기반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1979년 발생한 니카라과 내전과 1980년대에 계속된 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도시는 더욱 황폐화되었다. 시내가 빠르게 복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도심에서 외곽으로 이주했다. 난민촌이 건설되었던 마나과의 외곽에 지진 이후 새롭게 건설된 주거와 상업 지구들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예전의 도심은 대부분 공터로 남아 있는 반면, 최근 마나과에서 재건되고 있는 핵심 상업 지구는 옛 도심에서 10㎞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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