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비데오의 역사

몬테비데오의 역사

가. 도시의 건립

몬테비데오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시대에 라플라타 강 유역을 둘러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영토 분쟁 과정에서 건설되었다. 1580년 에스파냐는 버려졌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재건하였고, 이에 17세기 후반 포르투갈이 라플라타 강 건너 약 48㎞ 지점에 사크라멘투 신식민지(Nova Colonia do Sacramento)를 건설하였다. 그러다 1723년 포르투갈이 만(灣) 주위에 요새를 건설하자, 1724년 에스파냐는 그곳에서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반다오리엔탈(Banda Oriental)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도시 건설 이후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 강 북쪽과 우루과이 강의 동쪽 지역에서 해상 무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776년에 에스파냐는 몬테비데오에 대서양을 관할하는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1777년 말에 사크라멘투 신식민지는 에스파냐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나. 우루과이의 독립과 외세의 개입

유럽에서 진행된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의 영향으로 남아메리카에서 독립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우루과이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1811년 에스파냐의 군인 출신인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osé Gervasio Artigas, 1764~1850)가 반다오리엔탈 지역의 독립 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1812년에 반다오리엔탈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1814~1815년에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던 아르헨티나군을 격파하였다. 1816년에 아르티카스는 우루과이의 행정 구역을 6개 주로 분할하였으며, 몬테비데오에 최초의 도서관을 세우고 학교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1816년에 식민지 확장을 노리던 포르투갈군이 우루과이에 침공하였고, 1817년 1월에는 몬테비데오에 입성하였다. 이후 1824년 5월에 우루과이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에 합병되고 말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대치가 이어진 끝에, 우루과이는 1828년 8월이 되어서야 영국의 중재로 맺어진 몬테비데오 조약에 따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완충국으로서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후 1830년 헌법 개정으로 몬테비데오는 우루과이의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독립 후에도 우루과이에서는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내분이 이어졌고, 여기에 외세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 몬테비데오는 1843년부터 8년 동안 아르헨티나군에게 점령당하고, 1865년에는 브라질군이 입성하였다. 외세의 간섭은 1868년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3국 동맹을 체결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보였으나, 1903년까지 반란과 정권의 전복이 이어지며 내부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다. 국가 체제의 재정비와 도시의 발전

비록 1903년에 이르기까지 국내 정치의 혼란과 불안이 거듭되었지만, 우루과이는 1868년 이후 유럽 이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또한 영국 자본이 유입되고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몬테비데오에는 1886년 남아메리카 최초로 전구 공장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1903년 집권한 호세 바트예이오르도녜스(José Battle y Ordóñez, 1856~1929) 대통령이 우루과이의 내란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도시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등으로 몬테비데오 또한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우루과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한 국가였다. 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루과이의 정치와 사회는 친연합국 대 친추축국, 친서방 대 친사회주의 등으로 분열된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몬테비데오에서는 투파마로스(Tupamaros)라는 좌익 게릴라 집단이 결성되었고, 이를 빌미로 1970년대에 우루과이에 군부 정권이 수립되었다. 투파마로스를 진압한 군부는 1980년대까지 집권했으나, 경제와 정치의 위기를 불러온 끝에 결국 1984년에 민정 이양에 합의하였다. 이후 2002년 우루과이에 닥쳐온 경제 위기로 도시 전체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오늘날 몬테비데오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마. 라플라타 강의 전투

몬테비데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예외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도시였다. ‘라플라타 강의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였던 1939년 12월 17일에 몬테비데오 인근 라플라타 강에서 영국 순양함대와 독일 포켓 전함1)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전투일 뿐 아니라, 대규모 해전이 아닌 독일 쪽의 자침(自沈)으로 막을 내린 독특한 전투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망에 이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병력을 10만 명으로 제한당하는 등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1866~1936)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 수뇌부의 노력에 힘입어 장교단의 작전 능력이나 핵심 군사 기술 등은 온전히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33년에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tler)는 급속한 군비 확장을 통해 짧은 기간 내에 육군과 공군을 세계 최강의 수준으로 재건하였다. 하지만 해군의 경우에는 군함 건조에 소요되는 시간과 운용상의 어려움까지 겹쳐, 영국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의 전면전에 나서는 대신에 잠수함, 포켓 전함 등을 이용하여 영국의 상선단을 격침시키고 나서 도주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독일 전함 그라프 슈페(Graf Spee) 호는 연합국 상선단을 대거 격침하는 전과를 올리는 도중, 칠레 인근에서 추격해 오던 영국 순양함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라프 슈페 호는 여러 척의 영국 순양함을 대파하는 등 선전했으나, 애초에 방어력이 빈약하여 함대 간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탓에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당시 국제법에서는 군함이 중립국의 항구에 24시간까지 머물면서 물자 보급과 수리를 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독일 함장인 한스 랑스도르프(Hans Wilhelm Langsdorff, 1894~1939)는 몬테비데오 항에 기항하여 수리와 보급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영국 순양함대가 몬테비데오 인근 공해를 포위했고, 이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랑스도르프 함장은 승조원들을 함정 밖으로 나가게 하고 군함을 스스로 가라앉힌 다음, 독일 해군기를 몸에 두르고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남은 승조원들은 몬테비데오에 억류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들 중 상당수가 남아메리카 국가에 잔류를 선택하였다. 이 전투는 1956년 영국에서 ‘라플라타 강의 전투(The Battle of the River Plate)’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몬테비데오 근해에 침몰해 있던 함체의 잔해는 2004년부터 2006년에 걸쳐 독지가들에 의해 인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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