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야킬의 역사

과야킬의 역사

가. 도시의 설립

1530년대에 에스파냐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González)의 부관인 세바스티안 데 베날카사르(Sebastián de Benalcázar)는 현재 과야킬의 동쪽 바바오요(Babahoyo) 강 하구에 정착 거점을 마련했으나, 토착 원주민의 습격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1537년 에스파냐 탐험가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Francisco de Orellana)가 ‘산티아고 데 과야킬(Santiago de Guayaquil)’ 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과야킬을 건설했다. 이 지명은 도시의 설립 날짜가 가톨릭교의 성자 산티아고의 기념일이었으며, 에스파냐 정복자에게 용맹하게 맞선 원주민의 추장인 과야(Guaya)와 그의 아내 킬라(Quila)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나. 식민 시기

과야킬은 에스파냐의 통치 체제하에서 과야스 강의 내륙 수운 기능과 과야킬 만의 해양 진출 기능을 십분 활용하여 파나마와 리마 간 중계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해발 고도가 낮은 개방적인 지형으로 인해 해적을 비롯한 외적의 잦은 침입을 받았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해적단이 침입하여 과야킬의 주민 가운데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영국인 탐험가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와 선장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에 의해 주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후 황열병이 발생하면서 영국인들은 물러났고, 도시와 주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 독립 이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남아메리카 각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벌어졌다. 1820년 10월 9일 과야킬 시민군은 과야킬을 무혈점령했으며, 호세 호아킨 데 올메도(José Joaquín de Olmedo)를 초대 시장으로 하는 과야킬 자유주(Provincia Libre de Guayaquil)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에콰도르의 독립전쟁에서 시민군이 에스파냐 군을 이기는 분수령이 되었다. 1821년 에스파냐 군이 반격을 개시했으나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부관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가 지휘한 독립군은 과야킬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1822년 7월 26일,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이 만난 과야킬 회담(Entrevista de Guayaquil) 이후 과야킬은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양대 영웅이 마주한 이 회담에서 향후 남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은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하에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829년 페루군의 침공으로 과야킬이 점령되고, 이를 수복하기 위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ía Moreno) 장군 주도의 에콰도르 임시정부군이 페루군과 벌인 과야킬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과야킬은 전쟁 발발 7개월 만에 다시 에콰도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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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이아나
12. 우루과이
13. 수리남
14. 니카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