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의 역사

키토의 역사

가. 식민 통치기 이전

키토의 역사는 키투 족(Quitu)이 이 지역에 교역 중심지를 세운 1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의 명칭도 당시에 거주하고 있던 키투 부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키토는 약 4세기 동안 카라스(Caras) 부족이 세운 ‘키토 왕국’에 편입되었다. 키토 왕국은 1462년 약 25만 명에 이르는 잉카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잉카 제국에 복속되었다. 15세기 말의 키토는 잉카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Cusco)에 버금가는 정치, 경제, 문화적인 도시였다. 실제로 잉카 제국의 최후 통치자인 아타우알파(Atahualpa)의 궁전도 이곳에 건설되어, 북쪽 수도 역할을 하였다.

나. 식민 통치기

1534년 에스파냐는 잉카 제국의 잔해 위에 산티아고데키토(Santiago de Quito)를 설립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여러 차례 있었던 원주민의 저항을 제압하였다. 잉카 제국과 에스파냐 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키토는 세바스티안 데 베날카사르(Sebastian de Benalcazar)와 200여 명의 에스파냐 이주민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1535년 8월 28일에 키토는 산프란시스코데키토(San Francisco de Quito)로 개명되었다. 1541년에는 도시로 승격되고, 1563년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내 왕립 법원의 소재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에스파냐는 키토의 원주민에게 가톨릭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고, 그들을 성당과 수도원, 관공서 등 다양한 건물을 짓는 데 동원했다. 16세기에 건립된 산프란시스코 대성당(Iglesia de San Francisco)은 키토의 종교 건축물로 손꼽힌다. 1787년 무렵에는 대학과 박물관 등 대부분의 문화 시설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다. 독립과 공화국 시기

19세기 초 일부 키토 시민들은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했다. 그들의 계획은 후안 피오 몬투파르(Juan Pío Montúfar)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그가 주축이 되는 독립 에콰도르 정부를 수립하고 키토를 그 수도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810년 8월 2일 키토를 침공한 페루 주둔 에스파냐 군대에 의해 주모자 200여 명이 처형됨으로써 좌절되었고, 에스파냐의 키토 통치는 1822년까지 계속되었다.

1822년 5월 24일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장군 휘하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가 지휘하는 선봉 부대가 에스파냐 왕실군과의 피친차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키토는 에콰도르 공화국의 수도로서 독립했다.

이후 에콰도르는 지역 및 정치 이념의 대립으로 상호 진영의 핵심 인물이 암살되고, 폭동이 거듭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지속되었다. 그중에는 1875년에 암살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ía Moreno) 대통령과 1877년에 미사 도중 독살된 호세 이그나시오 체카 이 바르바(José Ignacio Checa y Barba) 대주교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1912년에는 엘로이 알파로(Eloy Alfaro) 대통령이 국가 내란죄로 체포되어 수감되는 등의 일도 일어났다. 이러한 키토의 정치적 혼란은 20세기 초 이래 차즘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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