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구시갈파의 역사

테구시갈파의 역사

가. 식민 이전

코판(Copán) 주의 코판 유적에 남아 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 등을 볼 때 온두라스에는 9세기 후엽까지 마야 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파야 족(Payas), 모스키토 족(Mosquitos), 렝카 족(Lencas), 수모 족(Sumos), 초로테가 족(Chorotegas) 등 여러 원주민들이 거주했다. 현재의 테구시갈파 지역은 원래 히카케 족(Jicaques)의 거주지였다.

1502년 콜럼버스의 제4차 항해 때 온두라스가 발견된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자 원주민들은 크게 저항했다. 지도자 렘피라(Lempira)를 중심으로 3만 명의 원주민들이 에스파냐에 대항했는데, 그가 살해당한 후 원주민들은 광산이나 농장에서 혹사당했다.

나. 식민 시대

1570년대 에스파냐 인들에 의해 원주민 촌락이 있던 피카초 언덕(Cerro El Picacho)에 정착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테구시갈파 주변에 은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스파냐 왕은 식민 수도인 코마야과(Comayagua)로부터 테구시갈파의 제한적인 자치권을 허용하고, 시장(Alcaldia mayor)을 파견했다. 1578년에 테구시갈파 산미구엘 광산(Real de Minas de San Miguel de Tegucigalpa)이 설치되었다.

1579년에는 후안 데 라 쿠에바(Juan de la Cueva)가 최초의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동력과 자본은 부족했고, 교통 시설과 기술은 미비하여 은광 사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목축업과 상업, 행정 등을 통해 온두라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지역으로 발전해 나갔다. 1762년에는 테구시갈파를 지칭하는 새로운 명칭(Real Villa de San Miguel de Tegucigalpa y Heredia)을 얻었다.

1791년에는 테구시갈파 지방 정부의 비리로 인해 북서쪽으로 56㎞ 거리에 있는 코마야과에 부속되었다가 1817년에 다시 자치 도시가 되었다. 새롭게 테구시갈파의 시장이 된 나르시소 마욜(Narciso Mallol)은 촐루테카 강에 최초로 다리를 놓았고, 테구시갈파와 마주보고 있던 코마야겔라(Comayagüela)와 연결되었다.

다. 독립 이후

1539년부터 과테말라 총독령(Capitanía General de Guatemala)의 지배를 받던 온두라스는 1821년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다. 이후 잠시 멕시코에 편입되었다가, 1823년에는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와 함께 중앙아메리카 연방(República Federal de Centro América)에 가맹했다. 1838년에는 마침내 온두라스 공화국(República de Honduras)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1824년부터 온두라스의 수도는 기존의 수도였던 코마야과(Comayagua)와 테구시갈파 두 도시를 오고 갔다. 1880년 테구시갈파가 온두라스의 유일한 수도로 결정되었지만 역사적으로나 교통이 불편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새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반론이 많았다. 당시 테구시갈파와 촐루테카 강의 건너편에 위치한 코마야겔라의 인구는 합쳐서 4만 명 정도였다. 1937년에 두 개의 도시가 합쳐지면서 중앙 행정구가 되었고, 현재까지 국가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주변 농촌 인구의 유입이 본격화되면서 테구시갈파의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는 가속화된 도시화로 용수의 부족, 실업, 범죄 등의 문제도 심화되었다. 특히 만연한 빈곤과 확대된 슬럼, 오염의 증가는 국가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1998년에 강타한 허리케인 ‘미치(Mitch)’는 약 5,6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홍수와 산사태로 15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키는 등 테구시갈파의 기반 시설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오늘날 테구시갈파는 교외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기존의 시가지 주변으로 연담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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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이아나
12. 우루과이
13. 수리남
14. 니카라과
15. 온두라스
16. 쿠바
17. 과테말라
18. 파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