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론의 역사

콜론의 역사

파나마 지협은 에스파냐의 탐험가인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는 현재 콜론 주의 카리브 해 연안과 콜론 시에서 동쪽으로 100여 ㎞ 떨어진 곳에 있는 산블라스(San Blas) 만을 항해하였다. 콜럼버스의 4차 항해 때에는 현재의 콜론 주가 위치한 대서양 연안을 ‘아름다운 항구’라는 의미로 ‘포르토벨로(Portobelo)’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200여 년이 넘게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는 계속되었다. 1751년에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에 편입되고, 1821년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그란콜롬비아(Gran Colombia)의 한 주로 합병되었다.

카리브 해 연안의 콜론 지역 개발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본격화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미국 서부에서 골드러시(gold rush, 1848~1869년)가 일어났고, 캘리포니아에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을 잇는 파나마 철도(Panama Railroad)를 건설하면서, 대서양 연안의 종점으로 콜론이 선택된 것이다. 처음 콜론 역의 위치는 리몬(Limón) 만 동쪽 기슭에 있는 만사니요(Manzanillo) 섬으로 결정되었다. 1850년 섬의 서쪽 편에 있는 습지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모기와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다. 습지가 매립된 이후 도로와 각종 건물, 수도 시설 등이 들어섰고, 1855년에 철도가 완공되면서 도시는 파나마 내륙과 연결되었다.

파나마 철도 건설 이후 콜론의 위상은 카리브 해 연안의 다른 항구 도시들을 뛰어넘게 되었다. 더욱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 계획되면서 콜론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1903년에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였다. 파나마의 독립은 파나마 운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등 강대국 간의 갈등과 협상의 결과였다. 미국이 질서 회복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고, 1903년 11월 3일에 파나마시티의 주민들이 콜롬비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미국 함대가 이를 저지하면서 파나마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졌다. 1904년에 파나마 운하와 그 주변 8㎞ 이내가 파나마 운하 지대(Panama Canal Zone)로 미국에 조차되는데, 콜론은 수도인 파나마시티와 더불어 운하 지대에서 제외되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로 콜론은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건설 공사를 위해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 해 여러 지역에서 흑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이는 인종적 구성과 사회 문화적 특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00년대에 약 3,000명이던 콜론의 주민은 파나마 운하의 건설로 1920년대에는 약 30,000명까지 늘어났다. 1948년에 만사니요 섬의 남동부 지역이 콜론 자유무역지대(Zona Libre de Colón)로 승인되고, 1953년에는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콜론은 극심한 경제적, 사회적 침체기로 들어섰다. 1960년대 폭동으로 시 정부 청사가 파괴되었고, 이어진 군부독재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1999년에 미국의 파나마 운하 인도 및 주둔 미군(미 남부사령부)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 자유무역지대의 확대로 경제적 침체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오늘날 콜론은 카리브 해 연안의 매우 중요한 관문이며, 국제적 관광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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