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14년, 임자년(壬子年), 1432년

조선 세종 14년, 임자년(壬子年), 1432년

1월 4일

• 혜민국 · 전의감 · 제생원 관원은 취재 시험의 성적순으로 등용하고, 다음 사람을 구원한 공적과 출근일수를 따져 등용하는 법을 정하도록 함.

1월 5일

• 원묘(原廟, 문소전과 광효전과 같은 궁궐 안의 왕실 혼전)의 터를 궁성 북쪽에 살펴보게 함. 6일 · 15일 · 18일에도 원묘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좌향 등은 종묘의 예에 따르고 5칸으로 짓게 함.

1월 18일

• 휘호를 부르지 말고 왕비 · 왕세자빈이라고만 일컫게 함.

1월 19일

• 사단직유(社壇稷壝)를 새로 쌓음. 단의 높이는 3척 너비는 25척, 사단과 직단의 간격은 8척, 유내 즉 담 안의 사방 너비는 모두 10장(丈), 유의 높이는 3척으로 벽돌로 축조, 유문(壝門)의 너비는 1장, 바깥 담장의 4면에 홍살문 설치.

• 맹사성(孟思誠) · 권진(權軫) · 윤회(尹淮) · 신장(申檣) 등이 새로 편찬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바침.

1월 21일

• 종묘 공신당을 묘정 밖으로 옮겨 짓게 함.

1월 25일

• 임금이 모화관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함.

2월 3일

• 검한성(檢漢城)의 아내에게 그전대로 작첩을 주게 함.

2월 14일

•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수륙재를 7일 동안 개설함.

2월 19일

• 평강 등지에서 강무함. 풍천에 머묾.

3월 2일

• 임금이 궁궐로 돌아옴.

3월 15일

• 한성부윤과 육조의 참판 · 참의를 각각 1명씩 더 두도록 함.

3월 16일

• 상정소에서 관제 개혁 건의하자 이조로 하여금 검토하게 함.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두며, 육조에는 참판과 참의 각 1명을 증원하여 좌우로 나누게 하고, 한성부에는 부윤 1명을 증원하는 내용.

3월 18일

• 이중지(李中至)를 한성부윤으로 삼음. 개정된 관제를 시행함.

3월 20일

• 임금이 서산(西山) 등지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함.

3월 23일

• 별시위(別侍衛)는 양반 자제로서 지원하는 자를 취재하게 함.

3월 24일

• 임금이 동교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함.

4월 6일

• 임금이 모화관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함.

4월 10일

• 임금이 인정전에서 탄일 하례를 받음.

4월 15일

• 판한성부사 노한(盧閈)으로 원접사를 삼음.

4월 18일

• 인정전에서 문과 · 무과에 급제한 자를 발표함.

4월 19일

• 군사를 선발하는데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은 따로 시험 보게 함.

• 별시위를 좌 · 우로 고치고, 한산인(閑散人)을 뽑아 정속시킴.

4월 22일

•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니 오부로 하여금 구료에 힘쓰게 하고, 긴급한 영선공사를 중지하게 함.

4월 23일

• 한성부로 하여금 전염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유리(流離)되어 양식이 떨어진 사람도 찾아서 아뢰게 함.

4월 27일

• 임금의 거소를 경복궁으로 옮김.

4월 29일

• 정초(鄭招)가 새로 주조한 종의 명(銘)을 지어 올림. 궁문에 걸고 조회 때 울림.

5월 4일

• 삼군부를 고쳐서 중추원으로 하여, 숙위 · 경비 등 직무를 맡게 함. 첨지사 이상 1명으로 입직하고, 1명은 감순(監巡)하는데 윤번으로 교대하게 함.

5월 11일

•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근정전에서 왕비를 책봉하니, 왕비가 상전문을 올림.

5월 13일

• 근정전에서 왕세자빈을 책봉함.

5월 18일

• 4월에 벌아현(伐兒峴) 초막에서 도적질한 명화도적을 참형에 처함.

5월 26일

• 신 · 구 관원의 교대 때 금전과 양곡의 인수인계는 《상정육전(詳定六典)》에 따라 시행하게 함.

5월 27일

• 대대로 전해지는 어보를 상의원으로 하여금 수장하여 후세에 전하게 함.

5월 29일

• 명나라 사신 창성 · 윤봉 · 장정안(張定安)이 오니 모화관에서 칙서를 맞이함.

6월 3일

• 명나라 세 사신이 목멱산에 가서 기도함.

6월 5일

• 한성부윤 이중지(李中至)를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보냄.

6월 9일

• 오승(吳陞)을 판한성부사로 삼음.

6월 14일

• 살인 · 강도 · 저주 · 간통사건, 변경수어(邊境守禦)에 관한 사건, 도망한 노비를 잡아 관에 고발한 사건, 타인의 노비를 허위문서 작성으로 강점한 사건, 남을 침손한 사건, 풍속에 관한 사건 등은 무정(務停, 춘분에서 추분까지 소송 처리를 정지하고 귀농하게 하는 것) 기간일지라도 소송을 접수하여 처리하게 함.

7월 7일

• 남녀 6명이 적선방(積善坊)에서 벼락 맞음.

• 날씨가 몹시 더워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놓아줌.

7월 11일

• 명나라에서 무역할 소 6천 마리를 여섯 번에 나누어 요동(遼東)으로 보냄.

7월 21일

• 박유전(朴有典)이 도관(都官)이 잘못 판결하면 형조와 한성부에서, 형조와 한성부가 잘못 판결하면 사헌부에서 분변하여 바르게 하고, 사천(私賤)으로서 부역을 피한 자를 숨겨준 사람은 부자를 추고하기를 건의함. 정부와 제조에 내려 의논하게 함.

7월 24일

• 명나라 사신 장정안(張定安)이 한강 등지에서 매사냥을 함.

• 사직과 종묘에 섭행하는 큰 제사의 천조관(薦俎官) · 종헌관(終獻官)은 모두 참의 이하 부제학 이상의 당상관으로 낙점받아 차정하도록 함.

7월 30일

• 역질에 걸려 죽은 사성(司成) 김최(金最)와 그 아들 · 딸들을 한성부에서 장사지내게 하고, 생존한 사람은 진휼하게 함.

8월 2일

• 최사의(崔士儀)를 한성부윤으로 삼음.

8월 3일

• 경복궁 녹사 2명을 창덕궁으로, 창덕궁지기 2명을 경덕궁(敬德宮)으로 옮겨 임명함.

8월 10일

• 임금이 창덕궁으로 옮겨 거처함.

8월 13일

• 부녀들이 평교자 타는 것을 금함.

8월 14일

• 사초(史草)를 잃은 사람에게는 은 20냥을 징수하고 서용하지 않게 함.

8월 15일

•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서 양녕대군 이하 종친들이 투호하는 것을 구경하고 연회를 베풂.

• 돈화문의 종을 만들 쇠는 경상도 폐사(廢寺)의 종과 경쇠를 사용하게 함.

8월 16일

• 선종 · 교종과 귀후소(歸厚所)에서 매골하는 중, 서책을 장정(粧幀)하고 주자소에서 각자(刻字)하는 중, 한증소(汗蒸所)와 별요(別窯)의 중 이외에 임무가 없는 중은 모두 논죄하여 군대에 충당하게 함.

• 원묘(原廟)의 구조를 태조는 북쪽에서 남향하고, 소(昭) 2위는 동쪽에서 서향하고, 목(穆) 2위는 서쪽에서 동향하게 함. 후침(後寢)과 전전(前殿) 사이에 월랑(月廊)을 설치하여 신도(神道)에 대비하게 함.

8월 27일

• 임금이 근정전에서 나이 80세 이상 된 노인에게 연회를 베풂.

8월 28일

• 중궁이 사정전에서 나이 80세 이상 된 노부인에게 연회를 베풂.

9월 1일

• 중들의 도첩(度牒)을 조사하게 함.

9월 7일

• 서선(徐選)을 판한성부사로 삼음. 전 판한성부사 오승은 중추원사가 됨.

• 한성 안의 직업 없는 중은 양종의 중을 제외하고 모두 직첩을 회수하고 군대에 충당하게 함.

9월 8일

• 순관(巡官)이 경수소(警守所)를 두 · 세번 순행하게 함. 목생(木牲, 나무로 만든 표지)과 언적(言的, 암호)을 사용함.

9월 17일

• 권도(權蹈)를 한성부윤으로 삼음.

• 원묘(原廟)를 ‘봉성전(奉誠殿)’으로 고치게 함.

• 진무소를 세워 군사를 맡게 하는 사의를 아룀.

9월 19일

• 임금이 의 곡을 지어 관습도감(慣習都監)에 내리게 함.

9월 20일

• 강주(姜籌)를 한성부윤으로 삼음.

9월 24일

• 임금이 살곶이에서 매사냥을 봄.

9월 27일

• 양주에서 강무함. 월개전(月介田)에 머묾.

10월 2일

• 임금이 환궁함.

10월 10일

• 오부(五部)의 각 방(坊)에 집이 빽빽히 들어선 곳에서는 집집마다 문을 둘 내지 셋 설치하게 함.

10월 11일

• 육조의 참판을 각사의 제조로 나누어 삼게 함. 장흥고(長興庫)에는 이조 우참판으로, 의영고(義盈庫)에는 호조 우참판으로, 광흥창(廣興倉)에는 예조 우참판으로, 경복궁 제거사(景福宮提擧司)에는 병조 우참판으로, 풍저창(豊儲倉)에는 형조 우참판으로, 도관서(imagefont官署)에는 공조 우참판으로 제조를 삼음.

10월 12일

• 신백정들의 자제들이 독서를 원하는 자는 향학에 나아가게 함.

10월 26일

• 충의위를 강무와 시위 등 근태를 상고하여 서용하게 함.

10월 29일

• 문소전의 양위와 광효전의 양위를 새로 세운 원묘에 봉안하고, 묘호는 문소전(文昭殿)이라 함.

10월 30일

• 삼각산 상봉에 집 세 칸을 짓고 동짓날에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일출과 일몰을 측후하게 함.

11월 1일

• 사정전에 나아가 종친들이 공치는 놀이를 봄.

11월 2일

• 원묘가 완성됨.

11월 9일

• 한성부윤 강주(姜籌)가 표문을 받들고 하례사로 떠남.

11월 12일

• 내년 봄 태평관을 지을 때 중들을 불러 역사하게 함.

11월 16일

• 상의원에서 간수하던 태종과 정비(靜妃)의 죽책(竹冊) · 옥책(玉冊) 등을 종묘 6실에 간수함.

12월 6일

• 명나라 사신이 떠나니 모화관에서 전송함.

12월 8일

• 이맹진(李孟畛)을 한성부윤으로 삼음.

12월 20일

• 사수색(司水色)을 다시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전함(戰艦)을 관장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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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4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