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종 원년, 기묘년(己卯年), 1399년

조선 정종 원년, 기묘년(己卯年), 1399년

1월 2일

• 명나라에 하례사로 가는 김사형을 임금이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전송함.

1월 19일

• 임금이 경연에 나아갔다가 전대의 군신 행적을 보고자 하여 《고려사》를 바치도록 하니 조박(趙璞)이 이를 바침.

• 축성 관원과 여러 절제사 휘하에게 첨설작(添設爵)을 줌. 이때 개성유후사의 성과 신도의 궁성 및 외성(外城)을 모두 쌓음.

2월 1일

• 금주령을 내림.

• 임금이 제릉(齊陵)에 제사하기 위하여 태조를 문안하고 개성으로 떠남.

2월 14일

• 뭇 까마귀가 궁성 북쪽 소나무에 모여 지저귐.

2월 15일

• 뭇 까마귀가 경복궁을 빙빙 돌았고 다음날도 또한 그러함.

• 임금이 개성유후사에 이름. 수창궁(壽昌宮)에 나아가 북원(北苑)에 올라보고 고려 태조의 도읍 선정의 지혜를 말하며 송경(松京)으로 도읍을 옮길 뜻을 보임.

2월 19일

• 뭇 까마귀가 궁성 북원에 모여서 지저귐.

2월 24일

• 임금이 개성에서 돌아와 태조를 알현함.

2월 26일

• 송경 환도를 의정함. 종척(宗戚)과 공신을 모아서 도읍을 옮길 것을 논의함. 서운관에서 까마귀가 모여 울고 집을 짓는 등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으니 피방(避方)할 것을 상언하자 조준 등 여러 재상과 의논하여 송경으로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함. 애초부터 도성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며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하여 길에 연락부절하니, 이를 제지하도록 함.

3월 1일

• 노비변정도감을 혁파하고 미결 · 오결(誤決) 등의 일은 모두 형조도관(刑曹都官)으로 보냄.

3월 4일

• 까치가 근정전 위에 둥지를 틈.

3월 5일

• 까치가 종루 꼭대기에 둥지를 틈.

3월 7일

• 개성유후사로 환도함. 공후(公侯)는 모두 따르고 각사(各司)에서는 반씩만 따름.

3월 9일

• 태조가 새벽에 송경에 도착하여 변안렬이 살던 집에 들어감.

3월 13일

• 임금이 유후사에 이르러 곧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갔다가 수창궁에 환어함.

• 태조는 시중 윤환(尹桓)의 옛집에 이어하고,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것을 부끄럽게 여김.

4월 1일

•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를 신도에 보내 종묘에 제사지내게 함.

4월 4일

• 큰 비가 내려 신도 서산(西山)의 큰 돌이 무너짐.

4월 16일

• 태조가 흥천사 사리전의 영선(營繕)이 더디다고 말하니, 내관을 보내 역사를 독촉함.

6월 27일

• 임금이 송도에 종묘를 영건할 것을 의논함. 종묘 제례는 대신을 신도에 보내 섭행하는 것으로 결정함.

8월 3일

• 분경(奔競)을 금함.

8월 8일

• 부엉이가 신도의 근정전 취두(鷲頭)와 태묘 옆에서 욺.

8월 10일

• 산올빼미가 신도의 근정전 위에서 욺.

8월 12일

• 신덕왕후의 기일재(忌日齋)를 흥천사에서 베풂.

9월 10일

• 경순궁주(敬順宮主)가 여승이 됨.

10월 17일

•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3방(房)으로 나눔.

10월 19일

• 태조가 흥천사 사리전이 낙성됨에 신도에 거둥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선왕(先王) · 선비(先妣) · 현비(顯妃) · 죽은 아들과 사위 · 고려의 왕씨를 제사지냄.

11월 17일

•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한경(漢京)에서 개성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장단에 가서 맞이함.

11월 22일

• 장단에 거둥했던 임금이 태조와 함께 밤중에 환궁함.

이해

• 한국산 의약서의 처방을 모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 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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